백과사전 몰락시대 / 박지영
가로등 옆구리에서 불꽃처럼 펄럭이던 주부사원 모집 전단지
제 임무를 잊어버린 나는 열에 들뜬 잠수함
입사 삼일 만에 퇴사해 줘서 고맙다고 보내온 감사장에는 벽돌 서른 장의 몸값이 위풍당당하게 박혀있었다.
묵직함을 휘날리며 방문턱을 들어선 벽돌들
세상의 온갖 지식을 품고 있다는 그들은 신처럼 경이로워서
좁은 방을 비워 벽돌들의 신전을 세우느라
부푼 맘으로 하룻밤을 꼴딱 세었다
고급 양장지로 무장한 천재들은 제 이름이 바뀌는 걸 싫어해서
아이가 자라는 내내 글자만 파 먹였다.
금덩이도 빵도 라면도 안 부러운 글자 바베큐
4번엔 괴테의 첫사랑이
5번엔 퀴리부인의 라듐이
7번엔 모차르트의 소나타가
가진 것 없는 엄마가 붙여준 가정교사
학원 수강료의 대리모
개천은 말랐고 용은 사라졌다
미꾸라지조차 외면한 어둑한 쪽방 책상머리
천재들의 생애가 교만한 지식과 조를 짜
카펫의 고대문자처럼 정교해질수록
세상 너머의 것을 바라보던
마음 아픈 아이
글자밥이 역해서 더는 안 먹겠노라 단식을 선언했다
세상과 결별한 작은 섬에서 건들거리던 백수들
눈칫밥으로 꾀죄죄해진 그들이 팔려가던 날
‘벽돌이 되게 해 주세요’
주문처럼 외우던 기도도 팔려가 버렸다
씨앗이 품은 꽃이름을 미리 알 수 있다면
한 방향으로만 나고 자라는 나무 없는 것을 알았더라면
무너지는 것의 균열이 오래전부터였다는 걸 알았더라면
과거를 가정하는 것은 꿈을 좇는 일인가
현실을 가정하는 것은 꿈을 꾸는 일인가
가정법 과거와 과거완료 사이에서
오늘도 나는 나를 고문한다
고문도구 이름은 희망
지금은 가고 없는 백과사전 전성시대
그 시절 뼈 때리던 벽돌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