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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무 Apr 15. 2022

포기한 것들에 대한 잔상 1

우리는 포기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고등학생 때 수학을 정말 좋아했다. 몇 년 동안 다니던 수학 학원 선생님도 너무 좋았고, 수학이라는 과목이 주는 깔끔한 느낌이 좋았다. 물론 '좋아한' 것이지 아주 잘 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나에게 반1등을 안겨준 수학을 내내 짝사랑했다. 하루는 수학 문제를 너무 열심히 풀어서 친구들이 수학 냄새나는 것 같다고 장난치던 때도 있었다. 그땐 그것도 뿌듯했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항상 나보다 더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특별한 꿈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냥 내가 언젠간 교사가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 꿈을 물어보면 대충 '교사요!'라고 대답했고, 수학을 좋아하던 나의 꿈은 자연스럽게 '수학 교사'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9월쯤에 수시를 접수했던 걸로 기억한다. 수시로는 딱 6개의 대학만 원서를 넣을 수 있어서 여러 대학교의 수학교육과를 알아보고, 4개의 소중한 카드를 서울에 있는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에 넣었다.


수학교육과에 수시로 합격하기 위해서 나는 고2 때부터 거의 1년간 수리논술을 준비해왔었고, 수학은 그렇게 잘하지 못해도 수리논술은 꽤나 잘한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수시접수를 하고, 하나둘 결과가 나오고, 수리논술 시험을 직접 보러 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니까 갑자기 수학이 무서웠다.


그냥 말 그대로 무서웠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점수는 오르지 않고, 새로운 문제는 풀리지 않고, 내가 과연 수학 임용고시에 붙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그렇게 수학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갑자기 나는 더 이상 수학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갑자기 마음이 그랬다. 그래서 4개의 대학교에 수리논술 시험을 보러 가지 않고 싶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 학원 선생님 모두 너 미쳤냐는 반응이셨다. 지금껏 해온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대학 가보면 또 수학의 느낌이 다르다, 할 수 있다, 등의 많은 조언을 들었다. 여기저기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고민을 털어놓고 답정너처럼 상대의 생각을 묻기도 했다.


사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 이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마치 그런 모습으로 성실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머릿속에 자리 잡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짝사랑하던 수학을 포기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지금 내가 이 것을 포기하면 내 미래의 모습이 잘 맞지 않는 퍼즐이 될 것만 같았다.


몇 날 며칠을 울고, 선생님께 도저히 못하겠다고 편지도 쓴 후에 결국 나는 수학교육과 네 곳을 모두 포기하고, 정시로 생물교육과를 지원해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교 4년 간, 수학교육과를 포기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지만 아쉬움은 종종 들었다. 물론 지금도 수학 선생님이 너무 멋있어 보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과학에 대해 관심도 없고, 당시 현미경을 조작하는 방법도 몰랐다. 과학을 사랑하는 동기들이 참 대단해 보였고, 그 사이에서 나는 기가 죽어 울기도 또 많이 울었다. 욕심이 많아지는 걸 싫어하지만, 잘하지 못하는 내가 속상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치열한 4년을 보내고 정말 운이 좋게, 하늘이 도운 것인지, 나는 임용고시에 한 번에 합격했다. 그렇게 나는 24살의 생물 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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