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어느 장녀

그 소소한 이야기

by Grace k

2001년 9월 25일,
공항까지 배웅 나온 엄마가 우셨다. 모두가 슬폈지만 내 손을 잡은 네 살배기 아들만이 신나 있었다.
그렇게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십 년째 근속하던 직장을 전 날까지 다닌 후였다.

고3 때 떠나가신 아버지의 부재는 컸다.
나는 장녀였고, 연년생인 남동생, 그리고 여섯 살 터울의 여동생은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했다.
부자가 아니었고, 간호사로 직장생활을 마감한
엄마가 억척스럽고 강인한 여성도 아니었다.
간경화로 오래 투병하신 아빠가 떠나시자
엄마는 그간의 긴장이 풀어진 듯했다.
자기 관리에 엄격하셨음에도 늘 아프셨다.
오십 년 전에도 삼 형제 모두 유치원을
보낸 엄마는 대학교육은 의무라고 생각하셨다.

버는 가장이 없는 집에서의 이후 10년은
집 팔고 저축을 헐면서 꾸린 살림이었다.
장남과 장녀는 자연스레 학사 학위에
만족해야겠고, 막내 여동생은 피아노 전공자의 꿈을 이어갔다.
전공에 대한 미련이 간절했지만
더 이상의 공부는 사치였다.

처음부터 이민은 달갑지 않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결정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그럼에도 등 떠 밀림이라는 수동적 내지는
반 강제적인 이유로 캐나다에 정착했다.
엄마는 의지하던 큰 딸의 빈자리까지 더해져
몸도 마음도 아프셨다.
무릎 수술 후유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시다가
요양 병원 생활을 시작하시게 되었다.
20년을 넘어서는 지금도
힘겹게 버티시며 딸을 기다리신다.
곁을 지키는 남동생도,
몇 번의 고비를 맞으셨던 엄마에게도
늘 미안한 큰 딸이고 누나다.
그렇게 매년 방문하는 내 나라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발권을 해 둔 상태다.
열심히 살았지만 뜻대로 이룰 수는 없었던
내 서사가 보잘것없다.

누나 노릇의 부족함은 해에 한 번 방문하는
여행으로 퉁친다.
좋은 날을 막연히 꿈꾸던 환상은 이제 없다.
어릴 때 받은 사랑이 내 자존감의 근원이다.
힘들었음에도 마음 모으고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그저 고맙다.


오늘이 조금 더 고단한 분을 안다.

나 또한 그런 시간을 부딪히며 왔다.

그래도 함께 힘내자고 전하고 싶다.

2002년 여름 록키 여행중 레이크 루이스에서 아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