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

익숙한 것과의 결별

by 찾다가 죽다


남녀노소나 양의동서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건 뭘까?

아마도 살아있는 삶 그 자체가 아닐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순간도 멈추지 않는 살아있다는 현상은 그것을 자각하든 안 하든 가장 오래된 습관이다. 어쩌면 그것은 고고지성의 시차를 감안하면 호흡보다도 더 긴 시간 일렀는지 모른다. 그만큼 삶은 각자의 수명과 상관없이 각자에게 익숙하다. 뒤집어 말하면 삶 저 넘어가 그만큼 불편하다. 낯설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후예인 서양인들이 농경민족인 동양인에 비해 삶과 죽음에 담담한 까닭도 아마 이 때문이지 싶다. 저들은 가족의 주검을 두고 몸부림치며 울지 않는다. (물론 요즘엔 우리나라도 초상집에 곡 소리가 잦아든 지 오래다) 잦은 이동과 객지 생활 혹은 해외여행의 자유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죽음을 그 닥 낯설거나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듯싶다.


대학에서 인문학 연구소장을 맡으면서 소위 죽음학 (사생학, thanatology)에 관한 연구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은퇴 후 초고령 사회를 살아가면서 이제는 단순한 연구 과제가 아닌 내 삶의 주제가 되었다, 서울 인근인지라 요양 병원이 유독 많고 주변 지인들 또한 내 나이가 평균 연령을 밑도는 수준이다 보니 더 이상 먼 훗 날의 얘기만은 아니다. 싶어서 이러 저런 모임에서 이 주제를 꺼내지만 공론화가 쉽지 않다.


죽음에 관한 공론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어령 선생이 자주 인용하셨지만 로마의 개선장군이 전투에서 이기고 의기양양하게 복귀할 때면 의례히 말미에 메멘토 모리를 외치는 병사가 뒤따랐다고 한다. 뜻인 즉 너도 언젠간 죽을 테니(너무 기고만장하지 말거라) 쯤이다. 또 인문학자 최진석 선생은 장자의 말을 빌어 吾喪我(오상아, 나는 나를 장사 지냈다)를 강조하고 자신도 매일 아침 죽음을 상기한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 전서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다.

끝간 데 없이 연장되는 고령, 초고령 사회의 평균 수명은 점점 더 죽음을 우리로부터 떼어 놓는다. 100세를 넘긴 노 학자가 정정한 모습으로 강연하는 장면은 많은 시니어들로 하여금 평균 수명이나 기대 수명이 의미하는 숫자를 외면하게 만든다. 그럴수록 삶은 더더욱 익숙한 자세로 우리 속을 파고든다. 그만큼 더 죽음은 멀어지고 두려움으로 남는다. 해서 세상은 온통 천년만년 살 듯한 기세로 흥청거린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가 자국 중심의 전체주의로 흐른다. 신 자유주의니 파시즘이니 하는 우려 섞인 용어는 이 기세에 눌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중력을 이기는 이 기세의 중심부에 삶에 대한 애착이 자리한다. 이 세상의 온갖 악다구니 그 원인은 이념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한) 삶에 대한 애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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