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여름 북경대학에서

by 초록 향기
북경대가을.jpg


화사한 가을 햇살이 붉은 기둥 사이로 스며든다.

회색 기와지붕 뒤 푸릇한 버드나무가 가을을 맞이하려 한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북경대학 캠퍼스를 걷다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센티해진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20여 년이 지나 다시 찾은 북경대학.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차가운 겨울이었다.

북경대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설레던 시절, 온 세상이 얼어붙은 듯한 매서운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그 시절의 내 마음처럼 그렇게 추운 날이었다.

그때의 캠퍼스는 지금과 달리 고요했다.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학생들, 조용한 도서관, 그리고 신분증을 제시하면 책을 볼 수 있었던 한국학 자료실. 박사 논문 자료를 찾으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던 시간,

필요한 자료를 발견했을 때의 벅찬 기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때의 나는 젊었고, 이곳은 내게 또 다른 세계였다.


두 번째로 북경대를 찾은 그 여름, 나는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인솔했다.

중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시간강사를 하던 시절,

딸아이 전학 문제로 갔던 초등학교에서 마침 방과 후 중국어 교사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중국에서 공부했다고 하자 교장선생님은 반가워하며 방과 후 교사를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된 방과 후 수업은 딸아이 또래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2002년 여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향했다.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오는 거리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기다림의 여행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10명의 학생과 인솔교사 3명이 26시간의 뱃길로 천진을 향해 출발하였다.


인천항을 출발한 배는 깜깜한 밤이 되어도 계속 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갑판 이로 올라가 밤바다를 구경하게 하였다.

갑판 위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들. 여자아이들은 손바닥으로 바람을 스치며

“선생님, 밤바다가 너무 예뻐요, 바람이 너무 부드러워요.”

하며 연신 감탄했다.

소녀들의 눈빛은 별처럼 빛났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갑판 위로 올라와서는 한번 획 돌아보더니

“뭐야? 깜깜하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하며 금세 내려갔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어릴 적부터 이렇게 감성이 다르다는 것을…


그 당시 나는 아이들에게 북경대학을 보여주고 싶어 관광 일정에 넣었다.

북경대학교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캠퍼스를 구경하던 중

한 아이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선생님, 똥 마려워요! 쌀 것 같아요!”

나는 아이 손을 잡고 건물로 뛰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라 건물문은 잠겨 있었고, 다른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다급해진 마음으로 기숙사를 찾아가 나오는 남학생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그 학생이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안내해 주었다.

나는 온몸이 땀에 젖었지만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다.

잠시 후, 아이는 환한 얼굴로 나왔다.


20년이 지난 지금, 북경대학캠퍼스는 더 이상 그 시절만큼 고요하지는 않지만

붉은 회랑과 건물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그 건물 앞에서 아이손을 잡고 화장실을 찾아 뛰던 젊은 날의 나를 보았다.


그 여름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어디선가에서 살아가고 있겠지.

북경대학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아이도 나처럼 그 여름의 긴박했던 시간을 떠 올리면서 웃곤 하겠지 하면서 혼자서 빙그레 웃어 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다시 중국을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