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1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쉬고 있다’는 느낌보다 ‘정리 중’이라는 말이 더 가까웠다.
남들은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워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취미생활을 하며 퇴직 후의 시간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40여 년을 대만과 중국에서 보내며 쌓인 책과 소장품들, 연구실조차 제대로 비우지 못한 채 서둘러 귀국했던 작년 여름의 혼란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게다가 그 무렵 새끼발가락 골절까지 겹쳐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고, 그 사이 몸은 금세 무거워지고 피로는 일상이 되었으며,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마음도 점점 멀어져 갔다.
올 11월 초 중국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신도시로 이사 온 지 4년이 넘었어도 중국을 오가며 생활하느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디서 머리를 깎아야 하는지, 어디서 운동을 해야 하는지, 나만의 일상 루틴을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수업도 하고 운동도 하며 내 자리가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보고 결정하는 과정이 늘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동네 가까운 필라테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상담조차 어려웠고, 상담 후 등록하지 않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까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한 필라테스 센터. 따뜻한 조명, 정갈하고 조용한 분위기, 그리고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상담 약속을 잡고 찾아갔을 때 처음엔 조금 낯설었지만, 딸아이 또래로 보이는 선생님의 설명은 차분했다. 무엇보다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듣는 설명은 더 전문적이고 편안했다. 중국에서도 잠시 1:1로 배우긴 했지만 설명은 늘 조금 아쉬웠다. 그런데 여기는 달랐다.
처음 내 걸음걸이와 발의 힘, 거북목 상태까지 세심하게 체크해 주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내 몸에 이렇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그동안은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내야 했던’ 시간이 더 많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상담을 마치고 등록을 하고 나오는데 문득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만 하다 보면 또 일주일, 한 달이 훌쩍 지나갈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니, 일단 저질러야 했다. 그래서 바로 등록했다.
퇴직 후, 그리고 귀국 후 나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었다.
지금 나는 리포머위에 서서, 60년 넘게 버티며 살아온 내 몸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중이다. 굳고 좁아진 근육들은 여전히 통증이 심하고, 새로운 동작들은 아프고 어렵지만 6개월 뒤 혹은 1년 뒤에는 조금 더 부드럽고 덜 아픈 근육이 되어 선생님과 함께 우아한 동작을 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겼다.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게는 지금이 바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때였다.
퇴직 후 비로소, 나는 나를 세우는 계절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