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다
봄은 내게 선물이다. 세상의 모든 식물들이 잎을 내고 꽃을 피우기 시작할 거고 무엇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화해진 기온이 꿈만 같다.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3월 20일 즈음은 산수유도 반짝반짝 빛나고 매화도 팝콘 터지듯 앙증맞은 꽃망울을 터뜨리며 달콤한 향기까지 내뿜는다. 바깥풍경이 다채로워진다.
일도 대체로 평온하고 나의 안과 밖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평온하게만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다. 무슨 일들이 일어난다. 직장에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민원이 발생하거나 어지럼증이 일면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무섭고 당황스러운 현상이 몸에 나타나거나 평온함이 깨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나의 안이 시끄러워진다. 불안과 걱정의 감정이 일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대부분 그런 일들은 지나고 나면 해결이 되거나 풀지 못한 일들도 어떻게든 적응되어 다 지나간다. 모든 것은 순간이고 다 지나간다. 그 괴로운 현재의 순간이 문제다.
최근에 작가 <박웅현>님의 서재를 소개하는 영상에서 세 권의 책이 눈에 띄어 주문했다. <허접한 꽃들의 축제>, <무경계>,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제목이 세상 지루할 것만 같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은 예전에 매우 흥미롭게, 어렵지 않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다시 읽으려고 함께 주문했다.
<허접한 꽃들의 축제>를 펼친다. 제목이 눈길을 확 끈다. 펼쳐보니 불교경전인 <금강경>을 해설한 내용이다.
그 괴로운 현재, 마음의 내적 방해물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힘을 <반야>라고 한다. 그리고 불건전한 상념과 정념, 충동들을 불식시키고 밝아지는 것이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사태가 <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은 책이나 강의에서 여러 번 접했지만 이 책으로 뜻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런데 또 이때뿐일 수 있다. 이렇게 <돈오:단번에 깨닫다)는 어렵지 않은데 <점수: 점차 닦아가다>는 쉽지 않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세상이 내가 보는 대로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자기 마음이 "자기 욕망의 투사로 인한 편견으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 어렴풋한 진실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꾸어나가자는 것이 불교의 근본 뜻이다. 혜능은 깨달은 자의 징표 가운데 하나가 "밖으로 사람들의 실수와 악행을 덜 기억하고 곱씹는 것"이라고 적어두었다. (허접한 꽃들의 축제 p54)
성찰과 명상으로 밖의 소음과 내부의 허덕임을 그만 멈추고 밖의 유혹과 안의 마군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상태가 깨달은 자의 내면 풍경이라고 한다.
금강경은 노래한다. "과거의 영광도 흩어졌고, 미래의 기대도 환상이며, 현재의 집착도 다만 물거품일 뿐"이라고.
어떻게 평탄심과 정정심을 성취할 것인가.
세상은 평온한데 내 마음만 공연히 바쁘고 조급하다. 안에 힘이 쏠리면 바깥은 점점 평온해진다. 그리고 돌아보면, 우리가 당시에 동동거렸던 일들이, 지나고 나면, 사소한 일이었던 것들이 적어도 태반은 넘지 않은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것들, 얻고 난 장난감들은 하루 이틀이면 방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 그토록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람들도 세월이 흘러가면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그 상념을 미리 당겨쓰면 현실을 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불교는 이 "뿌연 먼지"들을 가라앉히는 작업이다. 우선 마당에 찬물부터 뿌리고, 다음 이 먼지들이 어디서 오는지, 왜 이렇게 푸석거리는 구덩이를 밟은 듯, 일거에 우르르 일어나 온통 신심을 덮어버려, 뭐가 뭔지 앞이 보이게 하지 않는지, 그리고 이들을 가라앉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차분히 짚어보아야 한다.(p113)
모든 문제의 진원은 사실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 내부의 사랑과 미움의 투영에 불과하다. "애증으로부터 자유롭다면, 사태는 투명하게 드러난다"
인도 불교의 "다르마"는 투명한 세계를 가리킨다. 다르마는 "객관적 사태"이고 이에 대비되는 "상"은 "주관적 판단"이다...... 수행이란 마음에 불건전한 상념들이 더 이상 반복되거나, 강화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결단하는 일이다. 혜능은 "선부촉"이란 바로 그 지속적 정화의 노력, 즉 청정한 생각이 "이어져나가도록"하는 일이라고 해석한다. (p116)
사물은 정신의 투영이라, 정신의 깊이와 수준, 그리고 관심에 따라 사물이 서로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며, 또 그에 따라 그의 경험과 삶의 세계가 결정된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세계를 살려면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것, 즉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바깥보다 우선 안을 다스리라고 권한다. 우리 내부에 있는 오래된 독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이들을 제거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세상은 평온해진다.(p149)
우리가 '나'라고 불리는 것들은 실체라기보다, 이들 감각과 정념, 관심과 인식, 기억과 편견을 토대로 '부풀려지고', '증폭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래서 자아의 관념이 실체 없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자아의 투사에 불과하고, 그 자아는 감각과 충동에 연동되어 있으며, 이들은 자기 밖의 영향력과 그 흔적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자아'는 없고, 자아가 없다면 '세계'는 실재하기를 그친다.(p150)
아무려나 우리 각자는 이런 다양한 수준에서의 자아의식을 토대로 세상을 본다. 그러니 모든 것이 주관적 이미지가 아닐 수 없다. 예외 없이 누구나 이 토대에 바탕하여 사태를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만든 자기만의 '세계'안에서 살고 있다. 이를 (삼계유식)이라고 부른다. 나 밖의 대상은 언제나 '나에 대해서만'의미를 갖는다. 나의 관심과 이익에 호의적이고 유익하면 푸른색 딱지를, 그렇지 않으면 빨간색 딱지를 받는다. 나 밖의 것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내게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인지된다......
깨달음이란 사상으로 인한 의식무의식적 오염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 자각으로 하여 갈등과 혼란은 일시에, 촛불 앞에 어둠이 물러가듯, 문득, 기적처럼 사라진다. 거기가 이루어야 할 모든 것이다.(p155)
마음을 항복받을 때, 우리는 실제와 만나기 시작한다. 처음 1) 우리의 욕망과 그 '대상'물이었던 (변계소집) 세계는 2) 사물이 서로서로 관계하고 있는 (의타기)의 세계로 이동한다. 이것은 '시선의 혁명적 전향'이다. 그것은 욕망과 충족의 전망에서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유희와 소요의 시선이다. 그로써 돼지의 눈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과 '만나는' 자기 혁명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놀라워라, 거기 남을 비난하기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여기가 종교적 전희이자 치유의 시작이다. 그는 전혀 다르게 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기 마음의 우상을, 토대를, 즉 '상'을 깨뜨림으로써 얻은 것들이다. (p182)
현실적으로 자기만족의 흔적 없이, 또 돌아볼 보상의 기대 없이 베풀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은 '위대한 실천'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룩한 공적은 양으로 계산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질적 전환이기에, 우주를 뒤바꿔놓는다.(p183)
이 작은 발걸음을 보듬고 키워나가기는 어렵다. 우리는 아상을 축으로 세계를 읽고, 사람을 대하며, 일을 처리해 왔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 무지와 환상을 반성하고, 그 힘을 역전시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가자고 마음먹기는 정말 어렵다. 이것이 발심, 즉 '보리심을 발하기'이다.
이 자신 속의 잠재력을 격발 시키자면 때로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삶의 루틴이 급격히 변화하거나, 남다른 고통을 겪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거나, 혹은 직접 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런 전환의 기회가 더 많다. 원효도 '생사를 한번 겪어보아야' 불도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무한정 있을 것 같았던 시간이 실은 없다는 것의 자각이 우리가 안전하게 여겼던 삶의 토대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때 그는 거기 새로운 토대를, 토대 아닌 토대를 건설해야 할 실존적 필요에 직면한다. 삶이 찰나이고, 대문 밖이 저승임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은 이미 이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남을 향해 의미 있는 시선을 던지게 된다. 여기가 '초발심'이다.
초발심이 선다면, 이미 위대한 깨달음의 절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삶의 물길이 바뀌면, 이미 일은 거지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마음 하나' 바꾸면 삼계가 함께 춤을 추고 노래한다.(p185)
이 책 <허접한 꽃들의 축제>는 사물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 불도의 핵심이고 감각을 통해 '사물'이 수천 개의 화살로 '침범'하더라도 심리적 계산이나 정동의 발동이 자동반응하지 않도록 자신의 본성을 지키는 자리가 바로 무생이고 그 '의지'의 메커니즘이 멈출 때 우리는 '해탈'의 경지에 오른다고 한다.
그러므로 늘 스스로 돌이켜야 한다. 세상은 평온한데, 내가 스스로 상을 짓고, 스스로 찧고 까불며 깨춤을 추지 않는지를... 인간은 다들 이 오래된 습관이 만든 자기 감옥 속에 갇혀 산다. 그래서 중생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감옥의 크기와 성격이 세상을 보는 눈을 결정한다. 결코 세상은 자기 눈높이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p442)
자신의 이익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때, 일은 좀 더 수월하게 풀릴 수 있고, 자기가 완전하지 않다는 겸손이 사람사이의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된다. 틀림없다. 사람들은 그런 태도에 더 큰 신뢰를 두고, 신뢰가 있는 곳에 비경제적인 신비와 기적의 교환이 때로 일어난다. 계산에 밝아야 손해를 보지 않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판단은 특히 생소한 경우, 계산 밖의 비합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수가 많다. 어떤 사안에 얽힌 수많은 사항들, 문제들을 내가 다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거래에 있어 지식뿐만 아니라 교양과 태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p478)
(금강경) 맨 마지막에 적은 "꿈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고, 이슬 같고, 번쩍이는 순간 같은...."세계는 먼지 즉 망념들의 집적물, 혹은 결과물이다. 내 의식의 수많은 뿌연 먼지들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세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겨 읽을 문장들로 넘쳐나는 이 책의 끝에 책 읽기에 대하여 오래 읽고 하다 보면 사구게 한둘이 입에 붙고, 날마다 문득문득 그 가르침이 머릿속에 떠오르다가, 눈앞을 가리다가, 사람 얼굴에 나붙게 된다고 한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새길 뜻으로 가득 차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이 책 전체를 필사할 태세다. ㅋㅋ 한형조 교수님의 <허접한 꽃들의 축제>는 옆에 두고 날마다 읽고 잎에 붙여 떠올리고 눈앞에 가리다가 내 얼굴에 나붙게 <수지독송: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다>해야겠다.
팝콘처럼 터지는 매화 향기 속에서, 마음의 먼지를 가라앉히고, 투명한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