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녀 대서양 횡단기] 승선전 뉴욕 part.1

by 윤스로드

Day 1. 뉴욕, 설렘의 시작


‘세계 여행’이라 부르기엔 살짝 민망하지만, 미국과 유럽을 잇는 이 여정은 우리 세 모녀에게 진짜 ‘세계’였다. 새벽 4시,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3시 반. 내가 눈을 비비고 일어났을 때, 아이들은 이미 신이 나 있었다. 잠결에도 조잘대며 챙길 것들을 챙기던 두 딸. 왠지 오늘은 일이 너무 술술 풀리는 것 같아… 오히려 불안하다. 엄마의 직감은 예리하다.


4시 반, 집 근처에서 공항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수하물을 부치려는데 왠일, 방심한 내 탓이지... 작은 녀석이 욕심껏 챙겨둔 색칠공부와 스케치북, 문제집이랑 각종 젤리 사탕 같은 간식류들이 많긴 많았나 보다. 애미가 바쁘다며 작은 녀석 캐릭터를 너무 방심했다. 물론 치밀하지 못했던 애미의 계산 실수도 있었다. 유럽의 소매치기 영상을 너무 많이 봤는지 캐리어 3개는 영 부담스러워 억지스럽게 줄인 것이 제일 큰 실수!

결국 캐리어 2개가 모두 23kg을 훌쩍 넘어서 한진택배에 들러 작은 박스에 물건을 나눠 담고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방심한 애미탓이다.



다구간 항공권으로 저렴히 발권한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저가 항공이 아니다. 먹을 거리가 풍성하니 다시 신이 났다. 기내식에 레드와인을 곁들이고 스낵바를 몇 번이나 들락이며 가는 내내 흡족했다.

사전 체크인이 늦어 3-4-3 배열인 항공기의 창가 쪽은 모두 놓쳤지만, 가운데 4인 좌석 중 3자리가 우리 세 모녀의 자리였다. 그런데 내 옆 좌석 언니가 아주 늦게 탑승했다. 친절한 승무원이 그 언니를 다른 자리로 안내해주며 우리에겐 4인석 전부를 선물처럼 남겨주셨다.

“통로 쪽 좌석 비워두면 다른 사람이 와서 앉을 수 있으니 이쪽으로 옮겨 앉으세요.”

세 모녀가 널브러져 배불리 먹고 돌아가며 누워 자고, 너무 편안하게 14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뉴욕 JFK 공항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하지만 입국심사 때 짧은 영어로 여행 계획을 말하자, 심사관은 “나이스!”를 외치며 속전속결이다. 잘생기고 친절하기까지 한 심사관으로 인해 뉴욕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나이스'

그리고는 미리 예약해 둔 한인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IMF 때 모든 걸 잃고 미국으로 건너와 뿌리내린 기사 아저씨의 인생 이야기, 뜻밖의 미국의 복지 시스템에 대한 설명까지... 여행 첫날, 이국땅에 정착하신 교민들의 다사다난했던 삶의 단면들을 엿본 시간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맨하탄을 가로질러 11시도 채 안 돼 숙소에 도착했으나 체크인은 오후 2시에 가능하단다. 비행기에서 쉴 새없이 놀고 먹느냐 피곤한 세 모녀는 설렁설렁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다리는 무겁고 꼴은 초췌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게 그날따라 얼마나 든든하던지.

사진으로만 보던 타임스퀘어는 대낮임에도 눈부시게 화려했다. 북적이는 인파, 끝없이 빛나는 광고판,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첫인상이 강렬했다. 자본주의의 심장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랄까.

체크인까지 기념품 가게, 디즈니 스토어를 들르며 버틴 후 입실을 했다. 같은 힐튼 계열이지만 LA보다 객실이 좁은 건 아쉬웠지만, 뉴욕 물가를 감안하면 이 정도면 선방이라며 감사하기로 했다.


비행기에서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영화 보고 만화 보고 놀던 아이들은 녹초가 됐다. 짐을 풀자마자 그대로 레드썬. 엄마도 딸들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기절...

그렇게 우리의 뉴욕 1일차는 대낮 꿀잠으로 마무리되었다. 시작부터 우당탕했지만, 그래도 감사한 하루다.






Day 2. 뉴욕, 둘째 날의 진짜 시작


‘세계 여행’이라 하지만 실상은 미국과 유럽, 그리고 대서양 한복판이 전부인 비루한 여정. 하지만 우리에겐 찬란한 세계였다. 특히 오늘은, 여행이 시작되자마자 찾아온 작고도 큰 사건으로 시작됐다. 바로 큰 아이가, 이 낯선 땅에서 여자가 되었다. 하필 왜 지금이냐며 속으로 수백 번 탄식했지만 엄마는 다시 엄마의 모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침 일찍 거리로 나서니 눈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너무 춥고, 바람도 심하게 부는 스산한 날씨였다. 그런 날씨에 뉴욕 한복판에서 영어도 짧은 애미가 딸아이의 여성용품을 찾으러 길을 나섰다. 참고로 난 자궁의 병증으로 여성용품이 필요치 않던 터라 우리 세모녀의 한달짜리 여행일정에도 여성용품은 준비목록에 없었다. 그렇게 숙소 근처의 델리로 향해 큰 아이를 위한 용품을 구입했다. 짧은 영어로 팔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의 여성 용품을 내려달라며 부탁해 급히 계산하고, 남자들만 있던 델리를 수줍게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 검정 봉투에 아무말 없이 담아주던 아랍계로 보이는 그 남자분은 나의 부끄러움과 난감함을 제법 공감하는 눈치였다.

그 짧은 걸음 속에서도, 여행지에서 갑작스럽게 맞이한 성장의 순간은 엄마로서 여러 감정이 교차하게 했다. “왜 하필 여기서…” 하지만 이 또한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추억이 되겠지.



멀리 나가긴 부담스러워 도보로 갈 수 있는 일정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은 바로 뉴욕공립도서관과 뉴욕현대미술관(MOMA).

10시에 맞춰 도착한 뉴욕공립도서관. 지어진 지 100년이 넘었다는 이 고풍스러운 건물은 단순한 도서관 이상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높은 층고, 고전적인 인테리어,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조금 지루했을지 몰라도, 엄마에겐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공간이었다.

우리 동네 신축 시립도서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전미가 가득한 공간. 조용히 책을 읽는 시민들을 보며 뉴욕이라는 도시의 일상을 엿본 기분이었고, 나도 우아하게 그들 틈에 앉아 책을 보며 사색에 빠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두 딸 맘!!!



그리고는 곧바로 현대미술관 MOMA로 향했다. 현대카드를 소지하고 있었기에 동반인까지 무료 입장이 가능했고 바로 멤버스 서비스 창구에서 티켓을 받아, 가장 꼭대기 층부터 차근차근 내려오며 감상하기로 했다.

고흐, 마네, 모네, 클림트, 피카소… 교과서에서만 보던 거장들의 작품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감탄이 끊이지 않았지만—여기서도 현실은 녀석들. 춥고 피곤했던 작은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가?"를 외쳤고, 큰 아이 역시 마냥 넋 놓고 있을 나이가 아니었다.

엄마의 마음으로는 한참 더 머물고 싶었지만, 결국 아이들의 템포에 맞춰 빠르게 작품들을 스쳐보며 나와야 했다. 아쉬움은 컸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눈에 담은 게 어디냐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아마 비싼 입장료를 지불했더라면 작은 녀석이 좀 더 견뎠으련만… 공짜표라니, 안 아쉬웠는가보다. 알뜰한 녀석인데 몹시 비쌌다고 했으면 좀 더 참았으려나 싶어, 괜히 아쉬웠다.



숙소에서 30~40분 거리의 장소들을 진눈깨비 날리는 날씨에 걸었더니, 바지도 신발도 엉망이 되었다. 우산을 썼는데도 외투까지 다 젖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뉴요커들은 그 비를 그냥 맞고 다녔다. 다 젖은 옷 그대로 실내로 들어가는 걸 보며, 건조한 오피스에서 잘 말려 입는 건가? 한두 번 맞아본 게 아닌 듯한 그들의 자연스러움이 참 신기했다.

가는 길에 마주한 성 패트릭 대성당은 뉴욕이라는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무슨 수도원마냥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마치 뉴욕 한복판의 성스러운 쉼표 같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누룽지와 햇반, 김과 볶은 김치, 멸치볶음, 참치로 근사한 ‘집밥’을 차려 먹었다. 짐 줄이기 미션도 함께였다. 마이애미행 비행기를 탈 때 추가요금 피하려면… 많이 먹든가, 과감히 버리든가!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오후부터 다시 꿀잠 모드다. 날씨도 흐리고 기온도 낮아 저녁에는 따로 나가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오늘, 훌륭한 예술 작품들과 멋진 공간들을 만났으니 마음이 몹시 흡족하다.

뉴요커들이 누리는 일상의 문화생활이 부럽기도 했다.

어제도, 오늘도 조금 아쉬운 일정들이었지만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컨디션. 시차 적응을 위해 멜라토닌이 풍부하다는 타트체리까지 사왔지만, 필요 없이 그냥 잘 자는 우리 가족. 뉴욕에서의 둘째 날도 이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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