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들
낮게 지어진 주택가 사이에서 또 아래로 경사 진 골목을 내려가야만 했던 집이 있었다. 대문을 지나면 넓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집들이 모여있던 곳인데 그마저도 세를 들어 살았던.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소설 속에 나온 그 집을 상상해 내기 어렵지 않았는데 꼭 내가 살던 양림동 그 집의 모습과 닮았을 거라 느꼈기 때문이다.
그중 우리가 살던 집은 대문에서 두 번째로 가까웠고, 안마당의 넓은 나무 평상 바로 옆이었다. 주인집 이모와 엄마, 그리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곳에서 마늘을 까거나 나물을 다듬으셨고, 그 딱딱한 평상에서는 온 세상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어릴 적에 나는 그 평상 주변을 부러 얼쩡거리다가 이모들이 나에게 농담을 던지면, 그 작은 몸을 배배 꼬며 농담을 받아치면서 100원, 200원 용돈을 받아 슈퍼마켓으로, 문방구로 달려갔다. 주인집 이모네 딸들, 나보다 겨우 3,4살 많았던 언니들은 살뜰히 우릴 - 언니와 나 - 챙겼다. 엄마랑 이모들이 우릴 재워놓고 노래방이나 시내에 놀러 가면, 우리가 낮잠에서 깼을 때 주인집 언니들이 와서 달래주고 놀아주는 식으로. 지금은 아이들만 두고 집을 비우는 게 말도 안 된다지만, 우리 땐 그랬다. (라떼는 말이야.) 옆집 언니가 봐주고, 옆집 이모가 봐주고 하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다채롭게 받으며 쑥쑥 자랐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들은 죄다 나이를 불문하고 이모들이었고, 당신의 이름보다는 자식 이름이나 특색을 딴 이름으로 자주 불렸다. 철수 이모, 은주 이모라거나, 초록 대문 집 이모, 미용실 이모같이.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꼭 우리 이야기였다. 우리는 마을에서 자랐고, 그 동네의 넘치던 사랑이 우릴 키웠다.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빨간 고무대야에 물을 넘치도록 받아서 새하얀 면팬티만 입고 물놀이를 하기도 했고, 핑크색 쫄쫄이 내복만 입고도 동네 빵집에 심부름을 잘도 다녔다. 도로변에서 집으로 내려오는 골목의 경사로에서 담장을 지지대 삼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법을 터득했고, 어느 요일엔 동네 슈퍼 앞에 트럭 가득 실려온 고무로 된 장난감 말에 올라타 즐거워했다.
가끔 어스름이 깔린 저녁엔 골목 어귀에서 삼촌을 기다렸다. 지금은 작은 아빠가 된, 젊은 시절의 삼촌은 약속했던 시간에 항상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골목 안에 나타났다. 어쩔 땐 과자였고, 아이스크림이었고, 자전거였다가, 거북이기도 했다. 그 골목에서 삼촌이 사준 자전거도 배웠고, 집 안마당에서 거북이 집 물도 갈아주며 거북이들도 정성 들여 키웠다. 언니와 번갈아가며 키가 큰 삼촌이 태워주는 목마를 탔고, 삼촌이 온다고 약속한 날엔 소풍 가는 날처럼 맘이 들떴다.
바르르 떨리는 눈을 꼭 감은 체하고서 엄마와 아빠가 선물을 넣어두고 가기를 기다렸던,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6살의 크리스마스이브. 언니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엄마와 아빠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일어나 선물을 꺼내보았던 그날 밤도 선명하다. 귀여운 키티 도시락통에 스카치 캔디가 가득 들어있었던 그 선물은 6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기억에 망각이 더해지면 추억이 되나 보다. 돌이켜보면 우리 집이 가장 가난했던 시절이었는데, 온통 행복했던 순간들뿐이다. 두 아이의 엄마였던 사진 속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10살 가까이 어렸다. 어쩐지 젊은 엄마의 얼굴이 환하다. 힘든 시절에도 눈부시게 예쁜 엄마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은 우리들의 모습을 계속 보게 된다. 오랜만에 찾은 옛날 사진에, 오래된 행복을 꺼내어 보고는 별안간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