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셋째 외삼촌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원주행 버스에 올랐다. 비 내리는 차창 밖엔 짙은 초록의 산이 이어진다. 간혹 구름이 산허리를 감싼 모습이 마치 외삼촌의 영혼이 그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듯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 외삼촌 문병을 다녀온 후 써 둔 글이 있어 소개한다.
외삼촌과 외숙모
남편의 외삼촌께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우리를 보시고 외삼촌은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병상에 누워서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평생을 아내에게 큰소리치고 살아왔는데,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기만 하다.”며 참회의 말을 하셨다.
그동안 묵묵히 따라준 아내가 그렇게 크고 위대해 보일 수가 없다고 하셨다. 평생 약국을 지키셨던 외숙모, 반면 자신은 정치다, 사회활동이다 하며 세월을 보냈다. 어려운 시숙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조카를 뒷바라지한 일들도 모두 외숙모의 몫이었다. 하지만 외숙모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늘 웃으며 감당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고향의 약국에서 손님을 맞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했다. 자신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조용하지만 거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외삼촌은 말씀하셨다.
“이렇게라도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고, 아내는 삶의 승리자다.”
노자의 말처럼,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힘이 아닌 사랑이, 한 남자의 영혼을 흔들고 눈물을 흘리게 했다.
우리 부부는 삼십여 년을 고향에 갈 때면 일부러 길을 돌아 외삼촌 댁에 들르곤 했다. 집안 어른들이 베풀어온 일들을 알기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었다.
명절에도 외숙모는 늘 약국에서 근무하셨고, 집엔 외삼촌과 몇몇 식구들만 있었다. 작은 체구의 인자한 외숙모는 하얀 가운 차림으로 우리를 반기셨다. 조카가 일부러 찾아왔다며 이것저것 약과 영양제를 챙겨주셨다.
그런 외숙모를 알고 있었기에 외삼촌의 고백이 더욱 진심으로 와닿았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깊은 감동이 가슴을 채웠다.
- 삶의 승리자
외삼촌의 병문안을 통해 나는 삶에 대해 교훈을 얻었다. 인생의 종점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다짐. 그리고 외삼촌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외숙모 역시 그 고백을 들었기에, 자신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결국, 한 여인의 희생과 사랑이 되돌아온 셈이다.
내가 그동안 문학 속에서 만났던 ‘구원의 여성’들이 현실에도 있다는 것을 외숙모를 통해 확인했다. 가냘프고 힘없는 여성일지라도, 그녀의 어진 마음은 누구보다 크고 위대했다.
- 작별
외삼촌은 꽃 속에서 환히 웃고 계셨다. 모두가 입관 실에 간 뒤, 빈소에는 한 소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도 국화 한 송이를 영정 앞에 놓고 절을 두 번 드린 뒤, 성호를 긋고 기도드렸다.
“이 모든 고통 다 잊으시고,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외숙모는 내 손을 꼭 잡고 “어떻게 멀리서 왔어.”라고 하셨다. 말보다는 눈빛이 모든 마음을 전해주었다. 외삼촌이 태국 여행중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23년.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뎌냈을지 우리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 외삼촌이 치매로 요양원으로 가시기 전까지 분당에 사셨고, 나는 가까운 수지에 살면서 자주 가서 뵈었다.
외숙모는 유방암 수술도 두 차례나 겪으셨지만, 남편을 돌보며 삶을 이어오셨다. 외삼촌이 아내에 대한 진심을 가지고, 남은 생을 보내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외숙모도, 육체는 고달팠어도 그 고백으로 인해 마음의 위로는 받으셨으리라.
여자들은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느낌을 함께 하고 위로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여든이 가까운 연세로 약사 일을 이어가고 계신 외숙모의 모습은 아름답다. 일할 자리가 있고, 여전히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참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