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쓰는 이유

by 배니할

참을 만큼 참았다. 모처럼 모자를 벗을 날이 된 것이다. 흰머리가 3cm쯤 자라 오늘은 만사를 제쳐두고 염색을 했다.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염색을 마치고 그립을 말고 머리 손질을 했다. 모자를 쓰지 않아도 흉하지 않다는 자신감이 생겨 머리를 활짝 치켜들었다.

날씨가 더워 오늘은 진청색 마 스커트와 연보랏빛 상의를 걸치고 나오니, 나 자신이 그렇게 산뜻한 기분이 든다. 여간해선 드라이 한 마의상은 안 입는데 오늘은 특별히 검은 머리에 컬로 모양을 내니 어울릴 것 같아서이다. 마 옷은 수수하면서도 품위가 있다. 그리고 더운 날에는 이보다 더 좋은 질감의 옷감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은 여성에게 특히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머리숱이 줄고, 정수리가 훤히 비치면 괜히 초라해 보인다. 염색 시기를 놓치면 흰머리는 어찌 그리도 빨리 자라는지,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옷차림을 정성껏 꾸며도 얼굴과 머리 부분이 어수선하면 그 수고가 다 빛을 잃는다. 자신감도 떨어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지 않다.

그럴 때 내게 모자는 구세주다. 견딜 만큼 견디다 흰머리가 감당이 안 되면 모자를 눌러쓴다. 그래서 내 옷장엔 모자가 많다. 계절과 옷차림, 그리고 분위기에 맞춰 골라 쓰다 보니 어느새 수가 늘었다. 시장을 갈때면, 모자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꼭 사지는 않아도, 둘러보다 보면 마음에 쏙 드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사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친구가 “너한테 더 잘 어울린다”며 선물하기도 한다.

나는 주로 챙이 짧은 모자를 선호한다. 챙이 길면 햇볕을 가려 좋긴 하지만, 실내에서는 벗어야 해서 번거롭다. 사실 내가 진짜 원하는 모자는 실내에서도 벗지 않아도 되는, 베레모 비슷한 것이다. 교황님이나 추기경이 쓰는 둥근 모양의 작은 모자면 좋겠는데...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이 모자를 쓴다. 머리가 하얘도 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름철엔 사정이 다르다. 맨머리로도 땀이 흐르는데, 더위에 모자를 쓰고 있자면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얇고 시원한 소재로, 정수리만 살짝 덮는 멋스러운 모자를 찾는다. 시장을 돌아다녀도 마땅한 게 없어 결국 여름용 까만 뜨개실을 사서 직접 모자를 떴다. 귀 바늘로 뜬 베레모 모양의 모자는 눈에 띄지도 않고, 가볍고, 무엇보다 편하다.

가끔 모자가 잘 어울린다는 인사를 받기도 한다. 멋으로 쓰는 줄 아는 이들도 있지만, 그럴 땐 나 혼자 슬며시 웃는다.

친정어머니를 닮아 40대 후반부터 머리가 세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나 형님들보다 더 일찍 백발이 되어 서글펐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시작된 염색이 벌써 20년이 넘었다. 염색약도 여러 가지를 써봤지만, 다행히 알레르기는 없었다. 그래도 화학성분이 몸에 좋을 리 없으니 가능한 한 염색 주기를 늘리려 한다. 그래서 흰머리가 수북이 올라올 때까지는 모자로 버티는 것이다.

오늘은 염색이 잘 되었다. 머리숱도 제법 풍성해 보이고, 색도 자연스럽다. 새까맣지도 않고, 염색한 티도 덜하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예전 같으면 벌써 백발 머리에 쪽을 찌고 살았을 텐데, 지금은 염색도 하고 웨이브도 넣고 돌아다닐 수 있어 좋다.

이제 당분간은 모자를 벗고 지낼 수 있겠다. 머리칼 사이로 가을바람이 스며들도록, 두피와 마음을 시원히 식히며, 마치 모자를 쓸 날을 대비해 배터리를 충전하듯, 지금은 바람을 마음껏 맞으며 내 머리와 마음을 재충전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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