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들의 수다

옷장 정리

by 배니할

새벽, 장롱 안이 술렁였다. 편한 조끼가 몸을 부스럭거리며 잠든 옷들을 깨웠다. “주인님이 우리를 안방으로 부르셨어.” 노란 셔츠가 하품을 하며 의자에 걸린 청바지에 물었다. “새벽 네 시에 웬일이래요?”

주인님은 어젯밤 뉴욕에 있는 친구에게 가을 편지를 쓰고 나서 우울해지셨다고 했다. 나이 든 분이 소녀처럼 감상에 젖으신 모양이었다.

빨간 잠바는 금호강 변 코스모스밭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코스모스꽃을 머리에 꽂고 함께 노래 부르던 친구. 코스모스가 피면 수녀원으로 간그 친구가 생각난다고 하셨다.

그때 주인님이 장롱문을 열고 옷들을 꺼내기 시작핬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편한 조끼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기도나 하고 있어. 오늘 운이 나쁘면 우린 갈라져서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어.”

청색 남방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주인님의 사랑을 받은 지 5년이 넘었어.”

하늘색 세로줄 재킷이 놀라 소리쳤다. “저를 아끼시느라 장롱 안 제일 좋은 자리에 보관해 오셨잖아요.”

주황색 재킷도 불려 나왔다. 한때 화려한 꽃무늬로 우쭐했던 그 옷, 갱년기를 앓던 시절, 잃어가는 청춘을 보상받고 싶어 사셨던 흰색 옷들. 이제는 빛이 바래고 후줄근해졌다.

편한 조끼가 조용히 말했다. “주인님이 안쓰러워. 이제 정말 인생의 가을이 온 거잖아.”
주인님은 비닐봉지에 옷들을 담다가 다시 몇 벌을 꺼내셨다.

“세탁기 2차 탑승이야. 매립장만은 피했어.” 청바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재활용으로 간 옷들은 구제시장이나 어려운 나라에서 새 주인을 만난다는 위안도 있었다.

편한 조끼는 주인님의 메모를 읽어주었다. 최근 주변 지인들과 친척들이 세상을 떠나며 느낀 게 많으셨다고. 나중에 갑자기 떠나도 옷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지지 않도록 미리 정리하고 싶으셨다고.

‘비닐봉지에 들어가는 너희는 좋은 곳으로 가서 새 주인을 잘 섬기고, 세탁기로 들러갈 옷들은 겨울 동안 푹 쉬다가 봄에 다시 만나자. 그대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날 이후, 편한 조끼와 청바지는 운 좋게 살아남아 주인님과 함께 다음 계절을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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