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에게 약속한 봄방학 숙제를 겸해 경주여행을 하려고 동대구역으로 갔다. 코레일톡으로 미리 예매해둔 기차표 중 돌아오는 표를 SRT로 바꾸다 그만 잘못 눌러 바로 타야 할 표를 취소해 버렸다. 기차가 들어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8분. 부리나케 매표소로 달려가 8시 23분 KTX 표를 다시 끊어 겨우 기차에 올랐다.
동대구역에서 한 정거장만 가면 경주. 20분 만에 도착하고 보니, 어제 영천역까지 미리 답사하러 갔던 일이 새삼 우스웠다. 이렇게 쉽게 올 수 있는 것을 어제는 하양까지 전철, 하양에서 영천까지 버스, 다시 영천역에서 기차로 경주까지 가는 복잡한 동선을 살펴본 것이 완전히 ‘헛물’이었다. 남편이 늘 말하던 계량경영학의 효율성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났다.
경주역에서 대릉원까지 버스로 20여 분. 눈앞에 높고 둥근 능들이 잘 다듬어진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2000년 전 조성된 능들이 시대의 풍파 속에서도 잘 보존되어 이제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니, 새삼 감탄이 나왔다. 1973년에 천마총을 발굴되기 전까지는 숲처럼 방치돼 있었다고 하니 그 모습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된다.
천마총 내부 전시를 본 미나는 금관, 귀걸이, 허리띠, 금산발까지 온통 금으로 치장된 왕의 장례 유물을 보며 신기해했다. 나는 금이 얼마나 많았으면 마구까지 금으로 만들었을까 생각했다. 이런 보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 재미있지만, 미나는 아직 어려 대충 보고 뛰어다녔다. 그래도 괜찮다. 앞으로도 여러 번 오게 될 것이니 천천히 알게 되면 된다. 언젠가 “어릴 적 할머니와 천마총에 왔었지?”하고 기억해 주기만 해도 좋겠다.
대릉원을 나와 길을 건너자 신라대종이 보였다. 일명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대종이 이곳으로 옮겨져 있어 구경하기 좋았다. 나는 안내판을 미나에게 큰 소리로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짧은 시간이라도 이런 경험이 유물과 역사에 대한 작은 관심으로 남기를 바랐다. 할머니와 함께 뿌린 작은 씨앗 하나가 훗날 발아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경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미나는 의자에 엎드려 수학 숙제를 풀었다. 기차 안에서도 책을 꺼내 문제를 더 풀고, 동대구역에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서도 빈자리가 보이자 다시 문제집을 꺼냈다. 경주까지 다녀오느라 학원숙제를 못 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조차도 얼마나 귀엽고 대견하던지. 나는 연신 사진을 찍어 할아버지와 엄마에게 보내니, 할아버지도 “참 기특하다”라고 답장을 주셨다. 아침 일찍 나왔다가 돌아오니 아직 12시도 되지 않았다.학원 수업에도 지장이 없었다. 반나절 경주여행이라니, 정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오늘 미나와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미나가 어렸을 때, 오빠 석이만 데리고 경주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 뒤 몇 년 동안이나 “오빠만 데려갔다”라며 서운해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약속을 지키듯 미나만 데리고 반나절 여행을 한 것이다. 여행 내내 밝고 신난 표정을 보니, 그동안의 서운함이 말끔히 사라진 듯했다. 다음 방학에는 오빠와 셋이 다시 오자고 하니 미나도 좋다고 했다.
오늘의 여행은 뜻밖의 선물도 남겼다. 엄마보다 할머니가 더 좋다며 내 품에 쏙 안기던 미나. “할머니가 저를 사랑하는 줄 오늘 알았어요” 하며 환한 얼굴로 말하던 미나 덕분에, 나 역시 오래 묵은 오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둘만 함께 다니다 보니 미처 몰랐던 미나의 새로운 면도 많이 보았다. 어찌나 눈썰미가 좋고 민첩한지, 표지판도 재빨리 보고, 기차 칸도 능숙하게 찾아 안내했다.
반나절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손녀와 할머니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작은 봄방학 숙제가 우리에게 더 큰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