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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꿈 Sep 06. 2022

내가 좋아하는 것

20대 중반, 남자 친구가 질문했다. "여자들은 좋아하는 샴푸가 있던데, 너는 왜 없어?" 나는 그제야 여자들 또는 사람들이 특정한 샴푸를 좋아함을 깨달았다. 나는 어떤 샴푸를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가 사둔 샴푸를 사용했고, 내가 살 일이 있더라도 평소 쓰던 샴푸를 구매했다. 그 샴푸는 한방 탈모샴푸라서, 은은하게 한약 향이 났다. 남자 친구는 냄새를 맡을 때마다 의아했던 모양이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 몇 년이 지났다. 문득 당시 일을 떠올리며, 친구에게 물어봤다. "너도 좋아하는 샴푸가 있어?" "좋아하는 향이 있어?" 친구는 그렇다고 했다. 나아가, 데이트 갈 때는 남자 친구가 좋아하는 향을 풍기는 핸드크림을 바르기도 한단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타인이 좋아하는 것까지 고려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다지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20대에 만났던 직장 선배가 내게 해야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 의미가 '해야 하는 것은 많은데, 하고 싶은 싶거나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진짜 그러했다. 내 세상은 해야 하는 일로 가득 차 있었다. 공부를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자기 계발을 해야 하고, 좋은 직장인이 되어야 하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했다. 되어야 한다는 의무 사항을 빼고 나면 내 삶에 남는 일이 많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좀처럼 '하고 싶다'라거나 '좋아한다'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거나 좋아할 수 있다는 일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본다.


첫째, 하고 싶다거나 좋아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과 관련된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담은 끌림, 무엇이 좋거나 좋지 않다는 느낌은 감정의 영역이다. 하지만 오랜 가정 폭력 상황을 겪으면, 감정을 억압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공포와 두려움, 혼란감을 그대로 경험하는 것보다 억누르고 경험하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문제는, 가정 폭력 상황에서 적응적이었던 행동이 가정 폭력이 종결되거나 다른 상황에서는 부적응적 행동이 된다는 점이다. 나는 부정적 감정을 억압하고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긍정적 감정도 좀처럼 경험하지 못했다. 덕분에 폭력에 보다 둔감하게 반응할  있었지만, 세상에 그다지 재미있거나 흥미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좋다는 감정을 경험할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강렬하거나 생생하지 않고 피상적인 편이었으며 무엇이 좋은지 묻는다면  대답하지 못했다. 20 후반부터 내가 감정을 억압하는 사람임을 제대로 알았다. 하지만 변화는 매우 느렸다. 얼어붙었던 감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주 서서히.


둘째, 무언가를 하고 싶거나 좋아한다는 것은 표현하고 수용받는 경험으로 확인된다. 어느 날 천둥이가 블록놀이를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재밌어?"라고 물었다. 아이는 "응"이라고 하더니 "나는 블록놀이를 좋아해"라고 덧붙였다. 나는 아이에게 "너는 블록놀이를 좋아하는구나"라고 말했다. 아이는 비행기를 만들다가, "나는 비행기를 좋아해"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천둥이는 비행기를 좋아하지"라고 말했다. 어느 날 천둥번개에게 뭐하고 놀지 물었더니, 천둥이가 블록놀이를 고르며 "나는 블록놀이 좋아하잖아"라고 말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고 인정받는 일은 부모에게서 시작된다. 하지만 아이가 충분한 주의를 받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면, 좋아하는 것을 찾고 확인하기 어렵다. 폭력이 일어나는 가정에서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 일이 큰 일인가. 폭력에 비한다면, 아이에게 중요한 일이라도 결코 큰일이 될 수 없다.


폭력을 경험한 아이였던 내가 40대가 되기까지 여정을 돌아보면, 그동안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려놓고 좋아하는 것을 찾고 해 보려고 많이 노력했다. 이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샴푸에는 선호가 없지만, 좋아하는 향수가 있고, 좋아하는 음료가 있다. 라테를 마실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리고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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