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따질 깜냥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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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은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일뿐.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희망의 표현일 뿐. 사람이 모두 평등한 경우는 생로병사와 신 앞에서 뿐이다.
모든 중국 음식점 주방장들이 평등한 인간이라고 해서 그들이 만드는 자장면의 맛과 가격이 똑같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당신도 맛없는 자장면보다는 맛있는 자장면을 더 좋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 최근 남자친구의 추천으로 <조 블랙의 사랑> 영화를 봤다. 거기서 남자 배우가 했던 많은 멘트들 중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건 죽음과 세금"이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건 부자, 거지, 남자, 여자, 동물, 식물 모두 하루는 24시간이라는 것이다. 돈이 많다고 하루가 48시간이거나 돈이 적다고 하루가 12시간이거나 그러진 않다. 공평한 시간. 그래서 범죄자들에게도 형량이라는 시간으로 절대적인 물리적인 시간을 빼앗아간다.)
(* 나는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친구들에게도 하소연은 했지만 결정을 내리기 전엔 아버지에게 항상 전화를 했다. 마지막 현장에서 퇴사할 시점에는 여자 임상심리선생님에게도 아버지와 했던 통화내용을 말씀드리니 아버지가 마음에 든다며 옳은 말을 하는데 왜 듣지를 않냐며 하셨다. 정소연 선생님은 키 크지 않으려고 밥을 먹지 않는 아이처럼 군다고. 말을 하셨다. 나는 지금 내 키에 만족하면, 나는 지금 내 상황에 만족하면 밥을 그만 먹어도 회사를 그만둬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생각이었나 보다. 생각이 아주 어린 애새끼처럼 굴었다. 누군가를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 생각과 판단도 가벼웠던 걸까? 그랬던 내가 나 자신조차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주 어리석었다. 근데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만두려 했을까? 그 사유야 모든 문제에는 한 가지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여러 가지 사유들이 있었고, 그 사유들 속에서 나는 내 나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아버지는 당근보다 채찍을 줬고, 나는 채찍을 맞아도 그게 잘 소화가 되지 않았다. 당근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채찍을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바랬던 건 그냥 나대로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역할갈등을 겪기도 싫었고 그냥 온전히 나만 생각하며 살아본 적이 없으니 살아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럴수록 주변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연락 주지 않는 이 순간이 얼마나 좋던지 남들은 수 십만 원씩 휴대폰이 꺼지는 숙소(강원도에 1박에 30만 원 하는 숙소 이름은 까먹음)를 간다고 하던데 그 숙소가 비싸도 가는 이유들이 뭘까? 하도 불필요한 과도한 연락들과 교류들이 서로 피로감을 쌓고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도 강원도 숙소에 갈까 하다가 그냥 핸드폰을 꺼버리면 되는 걸 30만 원씩 버려가며 뭐 할까 싶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카톡대화면에 "카톡 x" 하면 어떠냐고 하던데 카톡 금지라고 해도 연락 주는 눈치 없는 종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랬다. 추가로 연락금지라고 대화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웃기지 않나 싶었다. 나는 연락을 할 땐 보통 뭐 해?라고 하거나 오랜만에 생각이 나면 이러이러해서 생각이 났는데 잘 지내지? 그 뒤로 답장이 오면 좋고 안 와도 나는 내 마음을 전한 거라 더 이상은 카톡을 하지 않는다. 서운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전한 걸로 끝이라는 것이다. 답장을 줄지 말지는 상대방마음이라는 것이다. 소통의 달인이라는 추*호 국회의원에게 메일을 보냈지만 내 메일조차 수신확인을 열람해 봐도 읽지를 않던데 그것 또한 그분의 대처라면 아 그런갑 보다. 하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 내 거 왜 안 읽어주세요? 수백 통 메일을 보내봤자. 내 시간이 아깝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당신의 연락을 씹거나 또는 연락을 하지 않거나. 그렇다면 마음은 딱 그 정도뿐이었던 것이다. 나도 한 때는 왜 내 연락을 보지 않냐며 울고 불고 떼썼던 적이 있었는데 그건 매우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갑 보다. 이런 마음이 오히려 편안함을 가져다줬다. 그러니 내 마음 = 상대 마음이 똑같지 않다고 사는 게 속편 하며 모두가 같지 않음을 인정할 때야 비로소 가벼워졌다.)
(* 여행도 함께보단 혼자가 더 좋았던 이유는 내 돈을 쓰고 내 시간을 쓰는데 나는 좀 더 진득하니 보고 싶고 머물고 싶은데 동행자는 그게 아니라면 맞춰줘야 한다는 것이다. 싫었어도 맞춰주는 인생을 살았다 보니 이제는 누군가한테 나를 맞춰주세요. 하기도 싫고, 나도 누군가한테 맞춰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 졌다는 것뿐이다. 미술 전시를 봐도 그렇다. 각자 취향이 다 다르니 한 작품을 10분 또는 20분 볼 수도 있는데 같이 간 사람은 5분만 보고 끝내버리면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그럴 땐 혼자인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시간을 정해주고 몇 시에 만납시다. 패키지여행처럼 같은 곳을 가되 자유 시간을 준다면 훨씬 자유로우면서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면 나는 심심함(외로움)과 괴로움을 택하자면 심심한 게 낫기 때문에 심심함(외로움)을 갖고 논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와 대인관계를 하는데 너무 편하고 안정적이라면 그건 누군가가 엄청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는 나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애를 써준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나도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애를 무진장 썼던 사이들도 있다. 엇나갔다면 그것 또한 시절인연이거나 인연이 거기까지였거나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이젠 17살이 아니라 37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