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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 Dec 05. 2022

추위의 종류

가슴을 피고 코를 열어  공기를 투입하다. 


오전 11시 경 집 밖으로 나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고 전하는 날씨 어플을 확인하고 흰색 롱패딩도 꺼내 입었다. 체온을 유지시켜줄 목도리도 챙겼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학교가 가기 싫어졌다. 가만히 서서 발가벗은 나무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모두 도착했다는 신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는 가야했다. 더 이상 빠지면 다음 번 수업에 들어갈 때 괜한 눈치를 살필 것 같았다. 



날카로운 공기가 나의 얼굴과 외투 밑으로 드러낸 나의 다리 주변에서 맴돌았다. 목도리를 챙기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내일이면 시작될 12월이 생각났다. 12월이라니 게다가 2022년의 12월이다. 그러나 내가 방금 기입한 '게다가'라는 부사는 순간의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매년 12월은 특별하기 때문이다. 작년의 김물도 분명 '12월이야. 게다가 2021년 12월!' 이라며 외쳤을거다.


열두달 중 가장 특별한 달을 뽑으라면 난 매번 12월을 선택할 것이다. 지나온 길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꼭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과거의 사진첩을 보는 것 처럼 12월에는 지나온 올해의 날들을 떠올리며 아련한 가슴을 한 없이 즐긴다. 새벽의 시간도, 12월도 한없이 풀어쓰는 두루마리 휴지 같다. 그러다가 다 쓰면 '벌써?' 라고 해버리는 그런 존재다. 



겨울에 불어오는 칼바람을 맞고 있을 때면 '추위'에 대한 생각을 머금곤 한다. 추위에는 육체적 추위, 심적 추위가 있다. 이 글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와 심이란 단어에서 풍겨지는 느낌으로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 둘이 어느 때는 붙어 있고, 어느 때는 전혀 모르는 사이가 되는 무질서함을 정리하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수곡동의 낡은 아파트는 겨울이 되면 흘러들어오는 냉기를 막을 수 없다. 작년 겨울, 독립이 처음인 김물은 공간에서의 무궁자재를 느끼게 되어 바닥에 불을 때는데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 몫은 오로지 본인에게 있었는데 말이다. 추운 겨울, 롱패딩 속으로 몸을 숨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니며 벌어들인 돈이 자유자재의 행위의 대가인 사실이 분하였다. '내년 겨울에는 대가를 경험하지 않겠노라'



그렇게 1년이 지나 올해 겨울이 되었다. 바닥의 불을 올린건 단 3번이다. 후리스와 수면 양말을 신고 잠을 청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또한 추위를 막을 수 없었으니, 내가 택한 방법은 침대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었다. 창문과 가깝게 붙어 있던 침대를 다른 위치로 옮겼다. 침대 틀을 드라이버로 풀고, 내 몸의 3배인 메트리스를 옮겼다. 캐롤을 들으며, 바닥을 닦으며 새로운 방으로 풀어 나갔다. 나는 이러한 행동을 할 때 내가 분명히 작년의 외침을 되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이라는 대가를 피하기 위한 나는 심적 추위에 떨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나는 심적 추위에 전혀 떨고 있지 않았다. 문제 상황을 풀어나가는 현명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다. 더 이상 냉기가 새어나오지 않는 벽은 심적 풍족에 가까웠다. 육체적 추위와 심적 추위의 상관관계는 11월 말 김물 집에서는 성립하지 않았다. 바뀐 방을 바라볼 때면, 스스로 일궈낸 결과물을 보는 것이라 수면 양말과 후리스를 입은 김물은 더욱 더 추위와 멀어진다.



최근에 읽은 책 중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책이 있다. 아니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이 책을 사랑하지만, 추위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아니 에르노의 이야기와 함께 펼칠 수 있는 조각을 발견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서 사라져 갔다.  

단순한 열정_17P



육체적 추위과 심적 추위가 함께 굴러가는 상황은 어쩌면 계절을 타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가 불륜남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달이 9월 이후인 것은 알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알지 못한다. 사랑을 하며 심적 추위를 느끼고 싶지 않던 아니 에르노는 순간의 강렬함을 겪을 수록 육체와 심적으로 모두 추위를 느끼게 된다. 육체와 심의 추위가 함께 그녀를 파고들었다. 그를 생각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였고 무기력함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에게 추위란 내재하는 추위일 것이다. 계절의 추위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동사를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어쩌면 추위는 겨울의 단어는 아닐 것 이다. 물리적 추위가 우리를 스칠 수 있지만 이는 큰일이 아니다. 그 대신 내재된 마음에서 비롯된 추위는 사계절 내내 찾아올 수 있다. 그렇기에 추위를 맞이하는 나를 살펴야한다. 심적 추위에 이어 육체적 추위로 이어지는지, 이어지지 않는지, 혹은 추위를 아예 잊는지 말이다. 더불어 품은 추위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보아야한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추울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당신을 혹여나 애처롭게 볼 필요도 없다. 누구나 추위를 품고 살지만 알고보니 추위가 아닐 수도 있다. 혹은 진짜 추위라면, 지나가길 기다리면 된다. 일상의 작은 행복 부터 찾아나가면, 의도적으로 밀치지 않아도 밀려나간다. 가령 매일 아침 일어나서 기지개를 피며 댄스곡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혹은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맞아보는 것은? 아님 드립 커피를 한잔 내려 호호 불어 마시는 느낌에 취해보는 것은 어떤가.



일상에서 가슴을 피고 코를 열어 공기를 투입해보자. 온몸을 휘감는 전율이 아마 추위를 밀어주는 중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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