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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 Jan 01. 2023

행복하지 않아도 돼

행복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부산은 단어만 들어도 설레는 도시이다. 김물이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넓디넓은 부산의 해운대부터 생각나니, 내 마음의 고향은 부산인 듯하다. 부산이 나에게 익숙하면서도 매번 설레는  여행지가 되기까지 부산으로 떠난 여러 번의 여행의 과정도 있지만, 부산을 마주할 때 나의 마음가짐 덕도 있다. 순간순간을 모두 마주하며, 즐기는 마음가짐 말이다. 부산역을 볼 때부터 내 마음은 뛰기 시작하는데, 부산 여행을 마칠 때마다 고개를 젓게 되는 부산 버스마저 얼른 타고 싶기도 하다.


이번 부산에서는 광안리에 머물렀는데, 아침 7시에 마주한 일출은 숨소리만 들리는 풍경이었다. 광안대교와 붉은 태양이 떠올라 물든 하늘이 맞닿으니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닭의 볏이 생각나기도 했다. 광안리의 붉은 아침은 꼭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자연의 알람 같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날에는 비가 바슬바슬 왔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숙소 앞에 있는 양식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계획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일정이었지만 비가 오는 하늘에 따라 부산을 다른 방식으로 즐겼다. 미리 예약했던 해변 열차를 취소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다시 씌우고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는 미리 예약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계획이라는 틀 안에서 자유를 외쳤다고 김물은 생각하니 그녀는 가히 거역할 수 없는 즉흥적 인간이다.  식사와 함께 즐겼던 생맥주는 그렇게 시원하고 달았다. 생맥주와 파스타를 즐기며 그동안 기다려왔던 여유가 이런 여유라며 느끼고 또 느꼈다. 흐린 구름이 걷히고 파도 소리에 집중할 수 있을 때쯤, 커피 한잔을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바다를 품고 있는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돌아간다는 것의 아쉬움이 아닌 멍하지만 맑은 눈빛으로 찾아가는 발걸음이었다. 


달리고 달렸던 2022년을 보내면서 부산에서 여유를 되찾아왔다. 쪼들렸던 마음이 조금은 펴져서 다시 새로운 한 해를 위해 더 멋지게 보낼 준비를 하게 되었다. 


2022년도 하반기 회고를 해보았다. 쓰는 내내 캘린더를 보며 빠뜨린 일정이 없는지 확인했다. 하루는 길었지만 일주일은 짧았고 한 달은 더더욱 짧았다. 그러한 달들이 모여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작은 캡슐 안에 나의 일들을 압축하여 넣은 것 같다. 그리고 캡슐을 땅속에 따듯하게 묻었다. 물론 매 순간 행복했던 것은 아니지만 인생이라는 책에 행복이라는 챕터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 김물은 행복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행복을 알았으면 되었다. 


행복이라는 챕터에는 여러 가지 목차가 존재한다. 그 목차들이 살에 닿을 때, 책을 읽을 때 앞 내용들을 잊는 것처럼 한 목차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면, 많은 목차들이 이어져 생각되면서 책의 한 줄 소개가 만들어진다. 삶은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은 목차들을 만들면서 그들을 잇는 날들이다. 그러니 매일 행복을 바라는 것이 오히려 욕심인 것이다. 멋진 사람은 매일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올해 깨달은 것 같다. 


아플 수도, 지칠 수도, 기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감정들을 다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한 줄 소개를 만드는 길이다. 그러나 행복은 인생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으니 당신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행복도 그저 감정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여러 감정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미국 작가 수전 케인은 [비터스위트]에서 인생은 달콤함과 씁쓸함을 함께 겹쳐 쓰는 비극에 가깝다고 말했다. 누구도 꽃길만 걸을 수 없고, 반드시 진흙탕을 건너고 자갈밭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린 이 힘들고 괴로운 세상에서도 좋은 삶을 이룩할 수 있다. 삶의 비극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승화해 아름다움을 빚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많은 나라의 전통문화에서는 행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기적이고 경박한 마음의 표출로 간주한다. 하지만 현대 서구 문화에서는 웃고 행복을 보여주는 문화가 일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과잉 낙관주의와 지나친 명랑 문화는 정신적 불균형을 가져오기도 한다. 


슬픔을 제대로 느끼는 사람이 인생의 환희는 물론이고 더 높은 행복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슬픔, 한계, 기질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많은 감정들을 다룰 수 있는 자아로 거듭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만을 바라보고 살지는 말자. 올해 가장 크게 깨달은 바이다. 행복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제대로 느끼는 사람이 되겠다. 


창 밖의 풍경을 보고 공기를 들이마셔라. 지금을 느껴라.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바빠도, 바쁘지 않아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도, 없어도 자신을 놓지는 말자. 무엇이든 날 것을 느낄 수 있는 촉촉한 사람이 되자. 소복이 쌓인 눈 밭에서 구르고 포근한 이불을 덮은 것처럼 느끼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엉뚱하지만 정확하고 날카로운 사람이 되길 바란다. 적어도 김물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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