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의 어느 하숙집
재수생활로 시작한 나의 첫 서울생활
내가 처음 서울 생활이란 것에 발을 디딘 것은 안타깝게도 재수시절이었다. 하기사 서울생활이라기보단 재수생활이 더 맞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거 다 부질없는 짓이었던 것 같은데 그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지방 사람인 부모님들은 서울에 가야 더 많이 배울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뭐든 지방보단 서울이 앞서간다고 선호했던 터라 서울에 있는 학원의 강사들은 지방보다 훨씬 뛰어날 거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었고 그런 수업을 들으면 내 자식 성적도 올라갈꺼라는 참으로 속모르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주위에 공부 잘 한다는 애들이 실제로 방학 때 한달이라도 바리바리 서울 가서 학원 다니고 오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나서는 막 sky대 가고 그런 걸 보았으니 그런 믿음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수능이 끝나고 평소와 비슷했지만 애매한 성적의 나는 우리 새끼가 이 정도일리 없다는 부모님의 욕심과 멎쩍은 입맛이 다셔지는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재수를 하기로 했고 수능 망한 초등학교 동창인 동네 친구와 같이 큼지막한 뜻을 사나이 가슴에 품은 채 굳은 각오를 다지고 서울에서 함께 하숙을 하면서 유명한 입시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해보기 위해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다.
부모님과 이별을 하고 친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KTX가 없을 시절이라 무궁화호 기차를 탈 땐데 좀 여유 있는 집안인 친구네가 새마을호 좌석을 당연한듯 끊어 놓는 바람에 얼결에 나도 처음으로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로 입성했다. 긴 시간 지나 그 날 긴 한강을 건너 올 때 그 기분은 지금까지도 그 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울렁이며 생각난다.
나와 친구가 합방하기로 한 노량진의 어느 하숙집을 찾아가 낯선 할머니와 내가 앞으로 숙식을 제공하니라. 하며 인사를 나누고 그 길로 이불을 사러 갔다. 낯선 동네에서 시작하는 절박한 마음의 생활이란... 나와 내 친구를 포함해서 4명의 하숙생들이 두 개의 방에서 두 명씩 나누어 지냈다.
여유 공간없이 빽빽하게 책상이 들어선 낯선 유명학원의 낯선 강의실과 낯선 사람들의 낯선 조합으로 인해 학원에 마음 두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갓 스무살 넘긴 남중남고를 졸업한 숯기 없는 청년에겐 여학생들과 한 반에서 공부한다는 것부터가 굉장히 적응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한 집에 남자 네 명이 있다 보니 때마다 마음 맞기가 너무 쉬웠다. 주말이면 스트레스 푼다고 넷이서 근처 학교로 농구하러 가고 모의고사라도 친 날이면 또 같이 노래방에, 야간 자습하러 가기 전에 잠깐 머리 식힌다고 또 같이 게임방에, 밤에 하숙집 할머니 주무실 때 우리끼리 술을 사다가 방에서 마시기까지...오히려 넷이 친해져 똘똘 뭉쳐 어느 때 보다 재미있게 보내 버렸다.
결국 나의 이런 생활은 2개월만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끝내게 되었지만 그 두 달은 내 인생에서 꽤나 혁신적인 변화를 동반한 신나는(?) 세월이었다. 하숙집이 있던 노량진의 그 동네...다시 그 집을 찾으라면 못 찾을 것 같다.
새로운 도시가 주는 생경함에 설레었고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그렇게 재미있던 시절이었다. 공부한다고 올라온 서울에서 공부했던 기억보단 재미있게 논 기억뿐이라 조금 죄책감이 들긴 하지만 그때까지는 순박했던 내가 처음 서울을 접하면서 서울을 조금 알게 된 재밌고 기억에 남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