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야 쫄지마

장소를 물색하다

by 쌀집아들

*9PM


다시 우리가 카오산 로드 쪽으로 돌아왔을 때는 밤 9시가 다 되어 갔다. 가는 길에 나는 이름을 모르지만 꽤 유명한 듯 한 사원에서 행사가 있는지 수많은 전등불이 휘황찬란하게 켜진 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먼가 호기심이 생기는 광경이었지만 우린 그 거리를 지나 카오산 로드로 곧장 향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도착한 3월 1일은 태국에서 만불절 이라는 중요한 불교 행사가 있는 날이라고 했다. 불교 국가에서 중요한 불교 행사이니 국가적으로도 큰 행사일 것이다. 아까 낮에 국왕의 행차도 다 이런 맥락이었던 것 같다. 이날은 어디에서도 술을 팔지 않으며 클럽들은 영업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연고로 수많은 라이브 바와 술집들에 앉은 사람들은 맥주가 아닌 음료수를 손에 쥐고 있었다. 굉장히 색다른 광경이었다.

“와~ 이것도 좀 신기하네. 다들 술이 아닌 음료수를 들고 있으니까 색다르네!!”

“진짜 절도 있는 나라다. 먼가 지킬 때는 딱 지키는 느낌이야.”

“멋진데?!”

“배우자 이런거.”

“호오~ 진풍경이다 진짜!”


사람들 구경과 함께 휘적휘적 걸어 다니며 여기저기 보는 중 마는 둥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공연하기 좋아 보이는 공간은 많았다. 카오산 로드를 중심으로 근처 골목들 까지 대충 돌아봤다.


“할 만 한데 많은데? 저기도 좋고 저기도 좋고.”

“근데 내일은 상황이 아마 다를 거야. 오늘 만불절이라 영업을 작게 하는 걸 거야.”

“아 그럴 수도 있겠군.”

“내일되면 여기 이런 거리에 자리가 쫙 깔릴걸?”

“아하 그런가?”

“그럼 내일 상황을 보고 정해야겠네.”

“하기사 이래 좋은 공간을 놀릴 리가 없지.”

“오후에 공원에서 한 판하고 저녁에 여기 상황보고 해야겠다.”

“그래야겠네.”

“일단 들어가서 좀 쉴까?”

“어, 좀 쉬자!”


밤 10시 무렵 우린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의 일정은 끝났지만 각자의 일정은 남았다. 형은 회사일을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는 재영이는 방송 편집을 하겠단다. 나는 할 일이 없다.


긴 하루였다.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몸뚱이가 납덩이 마냥 침대를 꾸욱 눌러 아래로 꺼질 것만 같았다. 다리가 저릿저릿했다. 시끌벅적한 소음과 불빛이 머리와 멀지 않은 창문을 넘어 들어와 방 안을 몽롱하게 했다. 아찔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이곳은 방콕이다. 체력이 바닥까지 내려간 지금 생동감을 느꼈다.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 이대로 이 만족감으로 조금만 쉬고 싶었다. 침대에 푸욱 퍼져 버린 몸만큼 눈꺼풀이 무겁지는 않다고 느꼈다. 천장은 높아 보였고 베게는 푹신하다...


하마터면 잠들 뻔 했다. 얼마간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자정이 넘어갔다. 자정이 지나면 날이 바뀌어 만불절의 제재가 풀린다고 했다. 진짜 절도 있다. 타국에서 맞는 첫 날 밤을 그냥 잘 수는 없다며 이 밤의 끝을 보기 위해 우린 또 숙소를 나섰다. 대단하다.


밤이 찾아온 카오산 로드는 화려했고 정신없고 복잡하고 지저분했다. 그새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음료수에서 맥주로 싹 바뀌어 있었다. 신데렐라의 마법 같다. 오던 길에 봐 둔 다소 한적한 거리에 위치한, 아무리 좋게 봐도 정원에 있는 연못 수준인 것 같은데 자기네들은 수영장이라고 광고하는 물 웅덩이(크기도 크지 않았고 실제로 수영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가 있는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태국 병맥주 3병과 팟타이를 주문했다. ‘꿀꺽꿀꺽’ 몇 모금의 맥주와 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온 몸이 풀리고 하루의 긴장이 스스륵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긴긴 하루의 끝에 들이키는 이국의 맥주는 금새 온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몸과 정신을 풀어 헤쳤다. 의자에 등을 기대거나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올려 몸을 지탱해야 버틸 수 있었다. 웬일로 셋이 말이 없었다. 그저 이 시간과 이 밤과 이 시절이 지나는 것이 못내 아쉬워 기어이 맥주병과 더불어 꽉 움켜쥐고 있을 뿐인 우리였다. 이내 재영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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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겠다. 재영이 잔다.”

“아니야, 나 안자.” 취객의 반사적인 행동과 대답을 보여주며 재영이가 고개를 들고 게슴츠레 눈을 떴다.

“야, 니 침 흘릴 것 같애.”

“쓰~~읍!”

“피곤할 만 하지.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다.”

“진짜 알뜰한 하루다.”

“좀 만 더 있다가 일어나자.”

“아~~ 너무 좋다~~!!” 기지개를 키며 내가 말했다.


맥주와 함께 더위가 어느 정도 물러간 방콕의 밤 공기가 알싸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후로도 얼마간을 더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있은 후에야 우리는 일어섰다.


“아까 오다 보니까 맥도날드 앞에 아주 죽이는 장소가 하나 있던데 한 번만 더 보고 갑시다.” 오는 길에 내가 눈여겨 봐뒀던 장소를 다시 한 번 봤다.

“장소는 너무 좋은데 내일 여기 상인들이 쓰냐, 안 쓰냐가 문제지.” 장소를 둘러본 상민이 형이 얘기했다.

“아까 보니 여긴 안 쓰는 것 같던데 내일도 그러지 않을까요?”

“오늘은 날이 날이라 그랬던 것 같고 내일 상황은 봐야 될 거 같애. 암튼 내일 보고 상황 되면 여기서 하자.”

“여기 딱 이긴 진짜 딱 인데...” 내가 봤던 방콕 버스킹 동영상들은 아마 다 여기서 찍은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장소가 너무 좋았다.

숙소로 돌아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둘은 일을 좀 더 하다 자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 새 잠이 깬 재영이는 갑자기 식욕이 폭발했는지 과자랑 라면을 먹어댔다. 거의 다 죽어가더니 좀비처럼 다시 살아나 움직였다.

“징허다. 야야, 살살해. 그러다 너 죽어~.”

“좀 만 하다 자야지.”

“그래 그럼. 난 먼저 잔다.”

“그래. 잘 자라~”


완전히 연소된 몸을 뉘이고 재영이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며 배게에 머리가 닿는가 싶더니 잠에 풍덩 빠져 들었다. 그렇게 방콕에서의 첫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