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다
돈 주고 악기를 산 것뿐인데 뭘 큰일 했다고 우리는 스스로들에게 감탄해하고 대견해하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번 여행에 대한 고찰과 새삼스런 감상평까지 해댔다. 감회에 젖어 숙소로 향하던 중 어느 큰 길 앞 신호대기가 좀 길어진다 싶더니 밖을 보니 경찰들이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기사의 말이 만불절을 맞이해 태국 국왕의 행차가 그 길로 지나간다고 했다.
“이야 이게 웬일이야? 진짜 운 좋다. 이 타이밍에 여기에 있다니...”
“오~ 태국 국왕이라니...”
“난 나가서 좀 볼래. 이런 행사를 언제 또 보겠어?” 난 택시에서 내려 큰길가로 갔다.
길가에 서서 자동차들이 통제되어 깨끗하게 텅 비어진 도로를 바라보고 있자니 머지않아 각지고 큰 검정 세단의 무리가 지나고 그 뒤를 이어 흰 색의 역시 각지고 큰 세단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저 차량에 주인공이 타고 있으려니 하고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노려보았다. 거리가 있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뒷좌석에서 앉아 핸드폰 카메라로 거리를 촬영하는 듯 한 여자아이를 본 것 같았다.
“우와~ 국왕의 행차를 보다니.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행차도 보기 힘든데 외국 와서 그 나라 국왕의 행차를 보다니...뭔가 뿌듯하다.” 택시로 돌아와 내가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뜻하지 않은 여행의 옵션이 더해진 것 같아 만족감이 더해졌다.
“너 뭐가 보이기는 했냐?”
“저 흰 차 뒷좌석에 누가 카메라로 사진 찍으면서 가는 것 같던데? 왕가의 가족이 아니었을까? 딱히 본 건 없음!ㅋㅋ”
택시를 호텔 입구 바로 앞까지 타고 왔다. 숙소로 돌아와 악기를 방에 진열해 놓고 보니 뿌듯했다. 떡하니 자리를 잡은 카혼과 한 쪽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는 기타라니...순식간에 방 안에 멋과 낭만이 가득해 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제야 비로소 안심이 좀 되었다. 시작 단계부터 자리 잡았던, 방콕에 도착해서까지도 맴돌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악기의 준비와 함께 머리를 덮고 있고 있던 답답한 모자를 벗어 버린 듯이 사라졌다.
‘하아~~개운하다~~~!’
“그래도 결국 구했네.”
“일단 이거만 있어도 할 수는 있지. 보컬은 생목으로 노래하면 되니까 ㅋㅋ”
“야, 생목은 너무 힘들어.”
“아 형, 퐈이팅이 부족한데?!”
“야 니네도 부를거잖아. 마이크 있어야 돼.”
“그래, 있어야지. 그냥은 힘들지.”
“그럼. 그럼.”
“마이크는 어떻게 할까? 아까 거기서 빌릴까?”
“마이크랑 앰프랑 다 빌려야지.”
“그래, 아까 거기 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안 되면 거기 가야지.”
“이번엔 시내 쪽 악기점으로 한번 가보자. 구경도 할 겸.”
“그래 시내 가서 저녁도 먹고 오자.”
“렛츠 무브무브!”
숙소에서 잠깐의 머무름을 가진 후 우린 다시 시내에 있는 악기점을 방문하기 위해 움직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단했다. 어떻게 그 정도로 움직일 수 있었는지... 그땐 참 그럴 수 있었다.
시내로 가려면 택시를 타야했다. 조금 걸어가다 택시를 타기로 하고 길을 잠시 걸어가던 중 숙소 바로 인근에서 공원 하나를 발견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소란스러운 도로변과는 달리 공원 펜스 안쪽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공원 곁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고 띄엄띄엄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여유롭고 한가로워 보였다. 공원이 주는 멋이 온전히 느껴졌다. 공원을 둘러싼 펜스를 경계로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이야~ 이렇게 좋은 데가 있었네!”
“어디서 음악 소리도 나는 것 같은데?”
“내일 여기서부터 시작해 볼까?”
“분위기 좀 둘러보자.”
나는 공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곳에서 공연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대에 오르기 전처럼 긴장되고 심장이 뛰었다. 공원은 깨끗했고 넓고 한적했다. 한 쪽에 위치한 넓은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요가인지 기체조인지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들렸던 음악소리는 체조를 위한 배경음악을 튼 커다란 스피커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래 큰 스피커를 쓰는 거 보면 여기서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근데 저런 단체들은 아마 사전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서 하는 걸 거야.” 형이 말했다.
“저기 관리자 같은 사람들이 있네. 가서 물어보자.” 재영이가 말했다.
공원 한 쪽에 작은 천막을 쳐 놓고 제복을 입은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음향 조절 기기들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셋은 용감하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물어보았지만 그들과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사실 이 정도 대화는 생활 태국어 수준을 넘어선 내용일 것이다.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한 것 그 이상의 어떤 소통도 없이 대화를 마무리 했다.
“해도 될 것 같애.”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 좋을 대로 마음대로 해석한 우리는 내일 이 공원을 기점으로 버스킹을 시작해보기로 결정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향했다.
우리가 내린 곳은 커다란 쇼핑몰 앞이었다. 방콕에는 참 쇼핑몰이 많다. 그것도 꽤나 규모가 큰...기본적으로 더운 지방이라 실외보단 시원한 실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어느 정도 일이 진척된 덕에 우린 모두가 기분이 좋았다. 흥이 절로 났고 모두가 들 떠 있었다. 길을 걷는 중에도 주구장창 농담 따먹기와 익살스런 장난을 했고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해가 저물어 가는 방콕의 거리와 도로 위를 꽉 채운 자동차들 그리고 주위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덩치 큰 건물들을 포함한 모든 풍경들에 낭만이 서려 있었고 우린 마치 한 편의 독립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눈에 스쳐 보이는 모든 것이 흥미로웠고 해야 할 일은 있었지만 언제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악세서리와 기념품 같은 것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프리마켓 같은 곳이 있고 그 사이로 과일 주스 가게가 보여 과일 주스를 또 한잔 했다. 빨대를 하나씩 입에 물고 할 일없이 걸으며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재영이는 노트와 몇 가지 악세사리를 샀다.
“야 이거 다 누구 주려고 샀냐?”
“지인들이랑 고마운 분들.”
“다정다감해 재영이.”
“넌 안 사냐?”
“어. 안 사.”
도착한 쇼핑몰은 정말 덩치가 컸다. 실내가 엄청 넓어 보였고 깔끔하고 세련되고 화려했다. 시원한 실내로 들어오니 상쾌했다. 물어물어 악기점을 찾았지만 그냥 딱 봐도 렌트는 안 해 줄 것 같은데다가 고가의 악기들만 취급할 것 같았다.
“형, 여긴 렌트해주는 데가 아닌 것 같은데?”
“머 그냥 물어나 보자.”
“하긴 쇼핑몰 악기점에서 렌트해주진 않을 듯.”
소심한 상민이 형이 가끔 대범해 질 때가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대범해진 상민이 형은 씩씩한 걸음으로 악기점으로 들어가 역시나한 대답을 듣고 나왔다. 형은 그냥 악기점에 들어가 보고 싶었나 보다.
“우와~ 근데 여기 기타 이쁘다~!”
두어 군데의 악기점이 더 있었다. 악기 구경이나 하는 셈치고 들어가서 부질없는 물음은 한 두 마디로 끝내고 악기들 구경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눌 수 있는 말이 제한적이었고 그러니 괜시리라도 문의하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시내에 있는 악기점까지 대충 돌아봤으니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자위적인 만족감을 안고 한켠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상황 정리를 했다.
“아, 다리야.”
“힘들다, 이제.”
“이 정도 봤으면 됐다. 걍 아까 본 데서 빌리는 걸로 하자.”
“그래 할 만큼 했다. 이제 결정하자.”
“아까 처음에 들렀던 데서 앰프랑 마이크랑 렌트하는 걸로 하자.”
“그래 그 수밖에 없다.”
“그럼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서 빌려 와서 이르면 오후나 저녁부터 시작하자.”
“오케이!”
“좋아! 좋아!”
“이제 밥 먹자!”
“그래 밥 먹자...배고프다...”
“다리 아프고 배고프다.”
“이 쇼핑몰 지하에 있는 푸드 코드 맛있어. 거기서 먹자.”
“오케이! 굿! 굿!”
형의 추천으로 쇼핑몰 지하에 있는 푸드 코트로 갔다. 쇼핑몰의 규모에 걸맞게 대형 푸드코트가 열려 있었고 음식 종류도 다양했다.
“야, 차분히 양껏 골라보자.”
“똠양꿍 먹어야지.”
“당연히 먹어야지.”
셋은 각자 흩어져 먹고 싶은 것들을 골랐다.
“골랐냐?”
“아직...”
“와 너무 많으니까 고르기 힘드네.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푸트 코트에 식당이 너무 많은데다 현지 식당에서 먹는 첫 끼이니 제대로 먹고 싶다는 의욕에 메뉴를 딱 정하기가 어려웠다. 두리번 두리번 두어 바퀴를 돌며 고민 고민 끝에 똠양꿍과 한국의 족발과 비슷하게 생긴 음식 그리고 탕 비슷한 류의 음식을 주문했다. (결국 본능적으로 익숙한 생김새에 위험이 적어 보이는 음식을 주문하게 되더라. 새로운 맛의 세계로의 모험은 똠냥꿍으로 충족하기로 했다.) 번호표를 받고 보채는 마음으로 다리를 떨며 기다린 후 나온 음식을 하나씩 가져와 한 테이블에 모았다. 멋모르고 주문을 한 탓에 받아 놓고 보니 딸려온 밥이 네 그릇이었다.
“와 이거 먼데? 하하하하!”
“야 미안하다. 내가 착각해서 밥을 이렇게 시켰네. 배 터지게 먹는 거지 그냥.”
“이야 진짜 포식하겠네. 아하하”
“아 진짜 웃기다!!ㅋㅋㅋ”
테이블 하나를 가득 채운 대접에 담긴 세 음식과 밥 네 그릇에 둘러앉은 조금은 지쳐 보이는 남자 셋. 그림이 썩 볼 만 했다. 먹다 남기지 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맛있었다. 우리는 연신 감탄해 마지않으며 와구와구 먹어댔다.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똠냥꿍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족발처럼 생긴 음식은 역시 족발 맛이었으며 탕 같은 음식은 탕 같았다. 먹어 치우는 페이스가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는 밥까지 남김없이 다 먹어 버렸다.
“희한해 희한해. 외국에만 나오면 좀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애. 원래 이렇게 많이 먹는 사람들이었나?”
“그러게, 결국 다 먹었어. 다행이다야.”
“우리가 많이 움직이긴 했지. 하루를 이틀처럼 보내고 있잖아 사실.”
“돌아다닌 거 생각하면 정직하게 먹은 듯.”
“현지 식당에서 제대로 먹은 감격스런 첫 끼다.”
“스스로가 놀랍군!”
“하지만 아직 오늘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 아까 공원 한 군데 봤고...카오산 로드 쪽에서 공연 할 만한데 있는지 미리 보고 들어가자.”
“그래 한 군데 더 보고 들어가자.”
“장난아이다.”
“좋아 좋아. 전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