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침, 호텔방에서의 작은 합주
*3월 2일
계절이 바뀌는 시절, 오랫동안 옷장에 있던 옷을 꺼내 입으면 섬유냄새인지 장롱냄새인지... 매캐하달까 쿱쿱하달까... 아무튼 그런 종류의 오래 한 곳에 묵힌 옷 냄새가 난다. 향기로운 냄새는 결코 아닌데 싫은 냄새는 아니다. 오히려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평온하게 만드는 그런 냄새다. 그 냄새를 맡으면 어릴 적 엄마가 ‘손 들어.’ 하시고 옷을 입혀주시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어느 날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몇 달 만에 꺼내 입은 후드티를 입고 나간 적이 있다. 그 날 여자 친구는 내 옷에서 나는 냄새가 좋다며 한참동안 코를 파묻은 채 나를 껴안고 있었다.
*8AM
오전 8시경 나는 잠이 깼다. 나는 평소에도 깊게 자는 편이 아니다. 밤을 꼴딱 세고 아침이 다 되어 잠이 들어도 정오에는 일어났다. 정신 놓고 온 종일 잠만 자고 싶다 마음을 먹고 자도 맘처럼 홀린 듯이 잠을 자진 못했다. 정신없이 자는 애들을 보면 저것도 복이고 재주다 싶었다. 대신 잠깐이라도 낮잠은 잘 든다. 길지 않게 10분 정도만 잠이 들었다 깨도 훨씬 개운하고 상쾌하다. 나는 그 기분이 좋다.
오늘은 유달리 잠자는 게 아쉬웠던 내 무의식의 활동이었을까 잠들기 전 이 정도의 피곤함이면 빨라도 정오쯤에나 일어나겠다 싶었던 예상과는 달리 일찍 잠이 깼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누워서 뒹굴 거렸지만 30분 째 정신이 말짱하다. 자는 걸 포기하고 반쯤 눈을 감은 채 몸을 일으켰다. 베개를 세워 벽에 기대어 몸을 절반 쯤 기대고 보니 맞은 편 침대의 재영이는 천진난만하게 잘 자고 있는 듯 했다. ‘몇 시 쯤 잤으려나?’
방 안은 훤했다. 뻑뻑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삐딱하게 벽에 기대 서 있는 기타가 눈에 들어왔다. 밍기적 몸을 움직여 기타를 품에 안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살며시 줄을 건드려 본다. 이른 아침 호텔 방에 나지막이 기타 현의 진동이 울린다. 재영이가 깰 까 눈치가 보였지만 멈출 생각은 없다. 처음엔 조심스레 그저 줄을 건드려보는 정도였다가 점점 용기가 생겨 대범하게 약간 튕겨보기까지 한다. 연습했던 곡들의 코드를 살짝...재영이가 잠에서 깬다.
“어 괜찮아. 연습해 연습.” 아직 목이 적셔지지도 않은 갈라진 목소리로 실눈으로 나를 보며 얘기하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쓴다. 추운 것 같았다. 내 머리위에 달린 에어컨에서 바람이 재영이를 향하고 있으니 밤새 추웠을 것 같다. 그래도 켜 놓는다.(나는 온도가 딱 좋았다.^^;;) 기타 줄을 계속 튕긴다. 나의 재주가 악기를 탓 할 정도는 아니지만 손에 익은 기타가 아니니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노래도 불러본다.
수백 번까진 아니고 수십 번 정도 연습했던 가사를 흥얼거리며 연습을 하다 그대로 침대에 넘어지듯 눕는다. 배가 고프다. 어릴 적부터 아침은 꼭꼭 챙겨 먹으려고 했었다. 그냥 부모님께서 그렇게 키워주셨고 그저 그래야 하나보다 생각을 했고 나이가 좀 들어서는 덜 늙으려면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사는 남자치곤 나름 챙겨먹으려 애쓰는 편이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프면 힘이 없다. 침대에서 나와 사부작사부작 뒤적거려보니 어젯밤 재영이가 쟁여놓은 먹을 것들이 냉장고에 좀 있다. 과자, 초콜릿 등 딱히 끼니가 될 만 한 건 없지만 일단 집어 먹는다. 먹고 다시 기타와 침대에서 뒹굴 거린다. 쓰다듬다가 같이 누웠다가 튕겼다가 안았다가...화장실에 가고 싶다. 생체 시계가 어느새 이 곳 시간에 적응했나 보다. 양치질도 하고 볼 일도 본다. 혼자 이것저것 많이 한다. 재영이도 뒤척뒤척 거린다.
다시 침대맡에 앉아 기타를 가지고 논다. 목까지 이불을 덮은 채 자던 재영이가 부스럭 움직이며 깨는 듯 하다 몸을 반쯤 일으킨다. 다 뜨지도 않은 눈으로 연습하는 날 보자 핸드폰을 켜 영상을 찍는다. 난 모르는 척 카메라에 담긴다.
“내 때메 잘 못 잤제?” 다소의 미안함에 내가 먼저 얘기했다.
“아니야, 괜찮아. 잘 잤어.” 착한 재영이다.
“몇시에 잤냐?”
“너 자고 좀 이따 바로 잤어.”
아직 눈이 다 떠지지도 않은 잠이 주렁주렁 열린 얼굴이지만 재영이는 부지런히 몸을 일으켜 카혼 위에 올라앉아 살짝살짝 두드리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호텔 방 안에서 뜻밖의 고요한 합주가 시작 된다.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다 퉁퉁 부운 얼굴과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보며 낄낄대다 한다. 낡은 호텔 방이 무대가 되고 한 귀퉁이의 창가로 넘어 오는 햇살이 우리의 조명이 되며 부드럽고 편안한 음악소리가 다소곳하게 방 안을 맴 돌아 평화와 여유로움이 가득해진다. 한동안의 자잘스러운 아침 합주가 이어진다.
잠깐 동안의 도란거림을 마치고 하루를 시작한다.
“가자. 어제 거기 가서 빌려오자. 상민이형 자고 있으면 걍 더 자라하고 우리끼리 갔다 오자.”
“그래. 그러자.”
건너편 형의 방으로 가 문을 연다. 방 문 걸림쇠가 덜커덕하고 걸린다. 완전히 뻗어서 자던 형이 놀라며 깬다.
“먼 보안이 이래 철저해? 혼자라고 잘 잠그고 자네.”
“어, 일어났어?”
“형. 나랑 재영이랑 가서 앰프 빌려올께요. 피곤하면 더 자고 있으세요.”
“아 그래도 돼? 일하느라 5시 넘어서 잤어.”
“더 자요 그럼. 갔다 와서 깨울게.”
“그래 미안하다야. 잘 다녀와”
“괜찮음. 우리끼리 생과일 주스 두 잔 먹고 올꺼임.ㅋㅋ”
“쉬어요 형~!”
방으로 다시 돌아와 재영이와 외출 준비를 했다. 잊지 않고 썬크림을 잔뜩 바르고 모자와 썬글라스를 쓰며 흥을 올렸다.
“이제 앰프만 준비하면 끝인건가?”
“모든 준비가 끝나는 거지.”
“그러면 오후부터 시작인건가?”
“시작이지.”
“좋아! 버스킹의 문을 활짝 열어 봅시다~~”
“자~~출발~~~~”
“고고싱, 고고싱, 고고싱.”
밖으로 나온 우리는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다. 하루 헤매고 돌아다녔다고 그 새 길이 많이 익숙했다.
“야 일단 머 좀 먹고 가자.”
“그래 상민이형은 없지만 회비로 먹고 가자. 형한텐 비밀로 하고. ㅋㅋㅋ”
“완전히 찬성! ㅋㅋㅋ”
“어제 오다 보니까 저기 느낌 나고 괜찮아 보이는 데 있더라.”
골목으로 들어가 넓은 테라스에 여러 개의 진갈색 나무 테이블을 펼쳐 놓은 느낌 좋은 식당으로 향했다. 사실 이 동네엔 대부분 이런 느낌이긴 하다. 식당으로 가는 골목 한 쪽에 드레드를 해주는 아티스트가 샘플을 펼쳐 놓고 있었다.
“나 드레드 할 거야.” 재영이가 말했다.
“ㅋㅋㅋ 오~ 진짜? 근데 머리가 짧은데 되나?”
“붙이는 거라 괜찮아. 이틀 만이라도 하고 공연할라고.”
“ㅋㅋㅋ 그래. 그런 거 좋아 좋아.”
“악기 렌트하고 들어와서 해야겠다. 얼만지 물어보고 가자.”
아티스트에게로 다가가 재영이가 물었고 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재영이가 이런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게 의외이면서 흥미로웠다.
“하우 머치?” 긴 건 100밧, 짧은 건 50밧 이라고 했다. 아티스트가 자기 머리에 매달려 있는 샘플을 보여 주며 추천한다. 재영이도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샘플을 만지작 거리며 가격을 물어보았고 무언가 만족한 미소를 띄우고 돌아섰다.
“마음에 듬?”
“어, 이쁘네!”
“니 저거 하고 카혼치면 진짜 느낌나겠다.”
“오케이!”
우린 식당으로 들어가 햇빛은 들지 않는 가장 바깥쪽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아침이니까 역시 모닝 세트 두 가지를 주문했다. 태국 전통 음식은 아니었고 약간 미국식이랄까 유럽식이랄까 토스트에 계란요리와 샐러드, 베이컨, 커피...머 이런 류의 세트였다. 셋이 다니다 둘이 되니 오히려 가뿐한 느낌이었다. 아침 새들이 지저귀듯이 재잘거리며 도란도란 아침 식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진짜 말이 많아.”
“진짜, 사내 새끼들 치곤 말 많은 것 같다.”
“해도 해도 끝이 없냐.”
이국적인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목적지로 향했다. 눈에 보이는 생과일주스도 한잔 마셨다. 어제 한참 걸었던 기억이 있어 택시를 타고 갔다.
어제 렌트 얘기를 나누었던 곳으로 들어갔다. 우릴 보고 통역을 도와주었던 옆집 가게의 사장님이 다시 오셔서 어제처럼 또 도와주셨다.(같은 집안 사람인가?) 앰프와 마이크 3개. 3시간씩 3일. 우리의 요구사항을 들은 사장님은 6천 바트를 요구했다. 기타와 카혼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처럼 가격이 확 내려가진 않았다. 우린 대번에 5천 바트로 하자고 했다. 사장님은 쉽게 5000바트에 승낙했다. ‘뭐지 이런 쿨 거래는? 얼굴은 또 왜 저리 편안해 보이지? 더 지를 껄 그랬나?’ 하지만 이미 뱉은 가격이 있는데 더 낮춰 부르는 건 상도가 아닌 듯 하여 5000바트에 렌트하는 것으로 합의가 될까 하는 와중에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시던 길 건너 온 옆집 악기점 사장님께서 차라리 구매를 하는 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 돈이면 구매를 하는 편이 더 싸게 칠거라고...그랬다. 어찌하여 가격이 그렇게 측정 된 건지는 도무지 납득이 안됐지만 애초부터 이 앰프를 팔아치울 생각이었는지 렌트 비용에 천 바트만 더 보태면 구매 비용이 나왔다.
“야 그냥 사는 게 훨씬 이득이네.”
“1000바트 차이면 그게 훨 낫네. 왔다갔다 교통비만 해도...”
“애초에 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야 이거... 대체 얼마짜리지? 우리한테 친절한 가격으로 주는 건 아닐테고...”
“역시 일이 이렇게 될 꺼였나?”
“이걸 빌리면 더 호구 되는 상황인 듯?”
“그러네... 사야겠네.”
“하아...............근데 뭐지....대형 바가지를 뒤집어쓰는 듯 한 느낌적인 느낌?! 자격지심인가?”
"그래 기분 탓이야. 생각하지마~"
뭔가 덤태기를 크게 쓰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렌트 가게의 사장님이 제시한 가격은 안 사면 등신이 되는 조건이었다. 우린 등신이 아니었다. 저쪽이 작정했다면 이쪽으로썬 당해낼 재간이 없다. 렌트에서 구매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앰프는 우리의 입맛에 딱 맞았다. 유선 마이크 하나에 무선 마이크 두 개 그 중 하나는 핸즈 프리로 연결이 가능했다. 쓸 일은 없겠지만 라디오 수신 기능에 블루투스 연결도 가능했고 디스코 버전으로 앰프를 키면 크리스마스트리 전구 장식 마냥 앰프 자체에서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반짝반짝 거렸다. 게다가 충전식 밧데리가 내장되어 있어 일반 콘센트에 꽂아 충전해서 사용할 수 있었고 캐리어처럼 바퀴가 두 개 달려 있고 상단에 접이식 손잡이까지 장착되어 돌돌돌 끌고 다닐 수도 있었다. 누군가 우리의 마음을 읽고 만든 것처럼 정말이지 아주 제격이었다.
“이건 진짜 한국에 가져가고 싶다. 완전 유용하게 쓸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진짜 딱 이네. 두고두고 쓰기에도 좋네.”
“기능도 많아. 야외 행사 같은 데서도 쓸 수 있을 것 같애.”
“그래, 사는 게 아깝지 않다. 물건은 맘에 들어!”
“좋게 생각하자.ㅋㅋㅋ”
앰프를 사기로 결정했지만 그게 또 끝난 게 아니었다. 필요한 것이 더 있었다. 정말 맨땅에 헤딩을 하려다 보니 사소한 것 까지 죄다 사야했다. 한국에서 좀 더 세심하게 준비해 왔어야 했다. 우리 셋 중 악기에 두 손이 묶인 사람이 두 명이라 마이크 스탠드가 하나 필요했다. 마이크 스탠드 천 바트. 도합 7000바트....부터 다시 딜을 시작했다. 웃는 얼굴로 어리광 부리고 애처로운 눈으로 사정하고 이리저리 어르고 달래며 사장님과 괜히 친한 척 한 결과 마침내 4700바트에 합의를 봤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예산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나름 만족스러운 금액이었다. 사실 현지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가격으로 팔리는 진 모르니 외국인 바가지를 쓴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예산을 몇 차례 바꾸며 늘려 놓았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기분 좋게 구매를 했고 이걸로 모든 악기들의 준비가 마무리 되었다.
“이야~~~~~~~~드디어~~~~!!” 이번에도 환호했다.
“꺄오~~~~~~”
“수고했다!”
“와~ 나름 감격스럽다.”
“벅차오른다~~”
가장 큰 산을 드디어 완전히 넘은 것 같았다. 실상은 그저 택시타고 근처 악기점가서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돈 주고 산 아주 간단하고 멋없는 단순 구매행위였지만 나름의 여정을 생각하니 별거 아닌 일에도 낭만이 깃들어 보였고 무엇보다도 큰 걱정과 의심이 걷히니 속이 뻥 뚫리고 아주 시원했다.
택시를 타고 돌아갈까 하다가 그래도 방콕이니 툭툭을 한번 타 보는 게 또 현지 체험이지 싶어 툭툭을 택시비를 주고 탔다. -.-;;
“야, 이게 원래 이렇게 비싼 거냐?”
“몰라 나도.”
“뚜껑 있는 택시랑 뚜껑 없는 툭툭이랑 값이 똑같다고?”
“몰라. 이게 여행이지.”
“그래, 관광비 포함이다. 이게 현지 체험이고 여행이지.” 그래도 툭툭은 택시와는 다른 현장감을 느끼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