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부뜨리 거리에서...
잠이 들었다기 보다 잠깐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어지러웠다. 느끼지 못했거나 무시했을 뿐 나의 소심한 마음으로 꽤나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비롯해 육체적 에너지를 쓴 것 같았다. 머리가 띵한 것도 같았고 약간 빙글거리는 느낌도 있었다. 낯선 고단함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난 동지들은 내친 김에 한 번 더하러 나가자고 했다. ‘그래 움직이자.’ 그랬다. 피로는 문제 되지 않았다.
*8PM
오후 8시경 우린 대차게 다시 악기들을 짊어지고 이번엔 카오산 로드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지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어지러움의 이유가 허기 때문인가 싶을 정도로 극심한 허기가 찾아왔다. 가는 길에 보이는 람부뜨리 거리의 한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와 맥주 한 병씩을 주문했다.
짠! 손에 쥔 맥주병을 부딪치며 우리를 자축하는 첫 건배를 했다.
“아...진짜 준비를 많이 해올걸 그랬어.”
“많이 했지, 이 정도면.”
“나 말이야.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들려 줬어야 되는데...ㅋㅋㅋ” 재영이가 한탄했다.
“ㅋㅋㅋ 이제 와서 후회하고 있니?”
“지금이라도 랩 연습해야겠다.”
“이게 이제 하라는 야자 시간에 공부 안 하고 시험 치기 직전 쉬는 시간에 공부하는 거지. ㅋㅋ”
“그렇지, 벼락치기 하고 있지.”
“처음 공연은 준비라 생각하자.”
“아까 보니까 베이스 음이 너무 높은 것 같더라. 좀 낮추고 트레블 좀 올리자.”
“아 근데 그 여자 분 아니었으면 진짜 황량할 뻔했어.”
“진짜 너무 고맙더라. 은혜를 입었다, 진짜.”
“천사다, 레알...”
“공원에서 한 번 하길 잘했다. 이제 긴장 좀 풀려서 진정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사람 많은 데서 아까처럼 헤맸다 생각하면 너무 바보 같잖아.”
자연스럽게 공연에 대한 얘기가 주저리 주저리 오갔다. 그리던 첫 해외 버스킹을 한 후의 소감이란...준비가 시작된 순간부터 지금까지에 대한 회고가 이어졌다. 사실 그다지 우여곡절이 있었다거나 드라마틱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극적인 순간을 헤치고 여기까지 온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저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한 동지들과 꾸며 왔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뿌듯했다.
공연 중에 일어난 서로의 크고 작은 실수에 대해 이야기 하며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배를 붙잡고 깔깔거리고 숨을 허덕거릴 만큼 정말 한참을 웃었다. 밥을 씹다가도 문득문득 웃음이 튀어 나왔고 어지러운 와중에도 정신없이 웃겼다. ‘이렇게 헉헉 거릴 정도로 낄낄 대며 웃었던 적이 언제 였던가...’ 긴장 없이 대놓고 낄낄 거릴 수 있는 시간, 눈치 볼 것 없이 깔깔 거릴 수 있는 시간, 거리 낄 것 없이 웃음 그대로의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시간, 정제되거나 사회화 되지 않은 각자가 가진 본연의 웃음을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생의 낙이 만개하는 시간이었다.
“또 힘내보자!”
“화이팅~!”
“출발할까?”
“나 어지럽다. 조금만 더 쉬었다 가자.” 쉽게 못 일어나고 내가 말했다.
“그래? 많이 어지러워?”
“많이 힘들면 들어가서 좀 쉴까?
“아니, 밥 먹었으니까 앉아서 좀만 쉬면 될 것 같애.”
기운차게 출발하려는 일행에게 현기증이 나니 조금만 더 쉬었다 가자고 얘기했다. 형이 걱정을 많이 해주었다. 이럴 때 역시 또 휴머니즘적인 감동이 온다. 힘든 시기에 같이 걱정해 주고 도와주는 누군가에게 감동하는 건 인지상정인 것 같다.
좀 쉬고 있자니 밥심이 좀 돈 덕분일까 현기증도 가라앉고 기운이 좀 낫다. 이 얼마나 동물적인 반응인가. 음식과 휴식의 중요성을 느끼며 나의 남은 술병은 재영이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멋지다. 남은 술 원샷하는 남자!
어젯밤에 봐두었던 장소로 향했다. 밤의 카오산 로드는 엄청난 인파로 붐빈다. 그 인파 사이를 짐을 메고 끌고 걷는 건 그 자체로도 상당히 성가시고 힘든 일이었다. 이리저리 비집고 돌아가며, 사람들을 피해가며 어렵사리 우리가 원했던 곳에 도착했지만 그곳은 이미 현지 상인들의 야외 테이블로 뒤덮여 있었다.
“역시 그렇네. 저런 장소를 그냥 둘리 없지.”
“그래. 형 말이 맞네. 어젠 날이 날이어서 비워뒀었나 보네.”
“하긴 너무 좋은 자리였어.”
“...............”
“...............”
“어떡하지......?”
우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망향지탄!
“..............”
“..............”
“음......람부뜨리로 다시 가자.”
“저길 다시?”
“다른 수가 없잖아.”
“그렇긴 하다...”
카오산 로드는 카오스였다. 여행객들과 현지 상인들이 거리를 틈 없이 채우고 불야성을 만들어 냈다. 진창에 가까운 인파가 만들어 내는 소란 속에 우리를 위한 공간은 한 뙈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왔던 길을 돌아 가는 수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돌려 다시 돌아가야할 길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했다. 저 난리통을 어떻게 헤치고 왔는데 다시 돌아 가야하다니....‘아놔...’
어젯밤에 주위를 돌아보며 차선책으로 생각해두었던 카오산 로드 건너편 람부뜨리 거리 초입으로 다시 그 인파를 헤치며 돌아갔다. 올 때보다 배로 성가시고 힘들었다. 원래 공부도 복습이 더 하기 싫은 법이다. 진을 빼가며 도착했지만 그 곳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제와는 모든 곳의 사정이 달랐다. 비어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그 곳은 툭툭 기사들이 자리를 잡거나 주차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오잉? 여기도 안 되겠는데?”
“어제와 다른 오늘이군...”
“정말 어제는 동네가 한가로운 편이었구나.”
“저 구석탱이에서는 할 만 해 보이네.”
주차장 한 켠에 자리 잡을 만한 공간이 보였다. 나름 길거리 공연의 분위기도 날 것 같고 적당히 사람들도 다니는 곳이라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이미 거기에 터를 잡고 자신들의 구역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툭툭 기사들의 눈치가 보였다.
“여기 대충 깔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될라나?”
“너무 눈치 보이는데...”
“저 아저씨한테 한번 물어볼까?” 우리가 삐질대고 서 있는 공터 바로 옆에 있는 건물 1층에 은행(으로 추정되는 곳)이 보였고 그 문 앞에 있는 은행(인 것 같은 곳)에 속한 경비원인지 주차장 관리인인지 알 수 없는 아저씨를 보며 형이 말했다.
“오히려 물어보면 못하게 할 것 같은데... 차라리 걍 시작하면 아무 말 안할 것 같은데?”
“그래도 물어 보는 게 낫지 않아?” 공원에서 한 번 제지를 당한 경험이 있던 터라 조심스러워진 형이었다.
“하긴 확실히 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긴 한데...”
애매해진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정쩡하게 셋이 서 있었다.
“근처에 한 번 둘러볼까? 할 만 한데가 있는지?”
“그럴까?”
“형, 여기 있어보세요. 재영이랑 나랑 주변에 좀 둘러보고 올게.” 선뜻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하릴없이 주위를 둘러본답시고 한걸음 물러났다.
나와 재영이는 별 기대는 없는 마음으로 근처를 대충 훑었다. 기대 만큼 마음에 드는 장소도 없었다. 우리 마음에 들 정도로 좋은 자리라면 누구라도 그냥 둘리가 없었다. 그나마 내 눈에 들어온 곳은 카오산 로드 건너편에 있는 사원으로 보이는 곳 주위로 둘러 쳐진 하얀 담벼락 밑이었다. 공원에서 한 번 쫓겨난 경험을 하고 나니 어떤 장소를 잡아야 하는지 짐작이 왔다. 그런 맥락에서 적합했고 적당히 판을 벌릴 만한 공간이 보였으며 밤거리에 보이는 하얀 벽도 느낌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미 황량한 거리에서 공연을 한번 했던 터라 한번은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곳에서 하고 싶은 아쉬움은 있었다.
“일단 한 번 물어보자.” 주차장에서의 거리 공연에 대한 욕심을 내보았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관리인에게 다가가 거리 입구에서 공연을 해도 되냐고 물어봤다. 예상했던 대로 대답은 ‘노’였다. 본전인가 이것은? 그래 본전만 해도 좋은 인생이야. 산다는게 그런거지.
“저 아저씨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볼까? 저 아저씨만 없으면 될 것 같은데...”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탐나는 자리였다. 미련마저 생겼다.
“그래, 그럼 잠깐 기다려 보자.”
과일주스를 한 잔씩 하면서 이래저래 사람구경하며 시간을 조금 보냈다. 반갑게도 이내 은행인 듯한 곳의 불은 꺼지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관리인 아저씨는 우리마음 같지 않게 전혀 퇴근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 주차되었던 차도 몇몇 빠지면서 공간이 완전히 확보 되어 딱 이다 싶었지만 그 아저씨만 그 자리에 망부석이었다.
“머지? 24시간 근무인가? 교대 근무 아냐?”
“아 괜히 물어봐서 더 신경 쓰여. 지금 그냥 무시하고 시작하면 될 것 같은데.”
“진짜 왜 안가는 거지? 밤새 있을라나?”
“왠지 우리 보다는 오래 있을 것 같다.”
우리 셋은 아저씨의 눈치를 보며 서성였다. 그나마 우리 중 대범한 축에 속하는 재영이가 씩씩하게 시작하자고 얘기했지만 우리 둘은 재영이만 보았다. 재영이는 그 자리에서 카혼에 앉아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툭 탁 툭탁!’ 소리가 몇 번 울리자 아저씨보다 먼저 주변의 상인들이 대번에 시끄럽다며 저리가라는 의사를 밝혔고 그제야 우린 미련 없이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할 수 없다. 저기로 가자.” 결국 우린 사원을 둘러 싼 흰색 돌담 아래로 가 자리를 잡았다.
“야, 여기가 아까 거기랑 머가 달라?” 약간 볼멘소리로 형이 얘기했다.
“그럼 어떡해요 도저히 자리가 없는 걸?” 나도 답답하다는 뉘앙스로 내가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목 좋고 분위기 좋은 곳은 이미 현지 상인들로 점거 당했고 그나마의 공간에서도 쫓겨난 상황이었다. 이런 외진 공간이 아니면 판을 벌일 수조차 없었다.
“카오산이 자유로움의 메카인 줄 알았는데... 막 자유롭지는 않네. 그냥 배낭여행자들의 메카였어.ㅋㅋ” 상황을 개탄하며 내가 얘기했다.
미련이 남아 눈길로 이리저리 주변을 쓸어 보았지만 다시 봐도 별다른 답은 없어 보였다. 결국 길게 뻗은 하얀 담벼락 중 그나마의 공간이 있는 곳에 악기들을 풀고 자리를 잡았다. 오히려 현수막을 걸만한 곳은 또 있었던 덕에 현수막도 걸고 촬영 카메라까지 세팅을 마쳤다.
판 벌인 꼬라지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하얀 담벼락을 배경으로 현수막을 걸고 몇 안되는 악기라도 펼쳐진 모양새가 그 동네의 분위기와 꽤 잘 어울렸다. 관객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맥이 빠지기도 했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니 전혀 긴장되지도 않았고 어찌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우리끼리 또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연주와 노래에 편안함이 느껴졌다. 완벽히 자위적인 공연이었다. 진정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는 자유로움의 메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