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댓바람의 버스킹
*3월 3일
감기에 걸려 특히 코감기에 걸려 약을 먹고 코를 몇 번 풀고 하다보면 귀가 멍하다. 이명까진 아니지만 귀가 멍해지고 몸이 나른해 진다. 이럴 때는 향이 좋은 커피나 차를 마시지 않는다. 어차피 향도 맡지 못하니 맛도 잘 모를 테니까 좋은 향이나 맛이 나는 것들을 아끼는 날이 된다.
*10AM
10시경 잠이 깼다. 인간적으로 그 시간정도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면 다들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의 활동량과 잠든 시각을 생각하면 오히려 일찍 일어난 편이다. 또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독방에서 깨 벗고 자고 있는 상민이 형을 깨우고 체크아웃 준비를 했다. 오늘은 아속역 근처로 숙소를 옮기는 날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사람일이 모두 마음에 달렸다는 말을 크게 느낀다. 어제까지의 일정을 생각해보면 오늘 일어나기조차 힘들어도, 몸살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게다가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자고 일어났는데도 상쾌하고 몸이 가뿐한 것이 컨디션이 좋다는 느낌마저 든다. 출근하는 날이었다면 몸이 천근만근(사실은 내 마음이 천근만근)이었을 테지만 여행 중이라 아주 가뿐하다. 역시 노는 게 제일 좋다. 다들 힘겨워 하는 듯 보이지만 이내 또 잘 움직인다. 다함께 오늘의 계획을 세워본다.
“바로 시내 쪽으로 갈까?”
“오전에 카오산 로드로 가서 한 번 하고 가자.” 카오산 로드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는지 재영이가 제안한다.
“진짜로?”
“어제 못했잖아. 오늘 사람 없을 때라도 가서 하고 가자.”
“오~추진력 좋아~!”
“멋진데?!”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방콕 버스킹인데...카오산 로드에서는 한 번 해야 면이 서지. 좋아!”
“그래 그럼, 카오산 로드에서 한번 하고 저녁에 시내로 가서 한번 하자.”
“오케이!”
“굿! 굿!”
어제 완전히 불태운 기분이 들었던 나는 사실 갈증이 좀 채워진 느낌이었지만 재영이의 한마디에서 시작된 동지들의 열정이 내게까지 번져 들어 다시 의지를 일으켰다. 역시 셋이라 다행이었다.
짐은 호텔에 맡겨두고 악기들만 챙겨 다시 카오산 로드를 향해 나섰다. 가는 길에 골목에 있는 노점에 빈 테이블이 보인 김에 주섬주섬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정확히 어떤 음식인지는 잘 모르지만 똠양꿍과 그의 형제들로 보이는 면 요리들을 주문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는데? 완전 해장된다. 먹어봐”
“히야~~기가 막히네 이거!”
“이야 진짜다. 너무 맛있다 진짜.”
재야의 고수를 찾은 듯 했다. 특히 똠양꿍이 일품이었다. 우리 모두는 감탄을 연발하며 면과 국물을 훑어댔고 개운하고 깊고 중독적인 맛에 젓가락과 숟가락질을 멈출 줄 몰랐다. 지금까지도 이 때 먹은 똠양꿍이 태국에서 먹었던 똠양꿍 중에 최고로 기억된다. 기분 탓이었을까? 아니, 실제로 맛이 그랬다.
혀와 위장이 만족한 식사를 마치고 다시 주섬주섬 일어섰다. 한 낮의 카오산 로드의 얼굴은 한 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난 밤 강렬한 화장을 하고 번쩍거리는 눈을 치켜 뜬 채 사람들을 이리저리 휩쓸던 카오산 로드는 해가 뜨자 멀건 얼굴로 무심한 듯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어느 가게 앞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더운 날씨에 그늘이 충분했고 준비되지 않은 가게에 드리워져 있는 셔터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는 짐 꾸러미들이 만들어주는 배경도 운치 있어 보였다. 딱 여기가 좋겠다 싶었지만 남의 가게 앞인데다가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주변의 고요함에 자리 펴기가 망설여졌다. 나와 형이 어물쩡 서서 여기가 좋겠는데... 여기가 좋은데... 하며 주저주저하고 있을 때 재영이가 당당히 나섰다.
“여기 좋네! 여기서 하자!”
“응? 괜찮을까?”
“여기 딱 좋은데? 여기서 하자.” 재영이가 과감히 추진했다.
“이래 당당해도 돼?” 우린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 주저하고 있었고 재영이의 몇 번의 적극적인 권유에 힘 입어 슬그머니 악기를 내려놓았다.
“재영아, 그럼 니가 좀 쳐봐. 그게 간보는데 제일 확실 하더라야.” 재영이의 카혼 소리로 주변 반응을 짐작할 수 있다며 형이 말했다. ‘툭 탁 툭탁! 툭 투두 툭툭 탁탁’ 재영이가 카혼 위올라 앉아 두드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몇 명의 사람들이 쳐다보긴 했지만 딱히 우릴 말리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소 안심이 된 우리는 슬그머니 기타 가방을 열고 짐을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악기들을 펼치고 나니 더 분위기가 좋았다. 거러지 밴드랄까? 그런 빈티지한 느낌이 물씬 났다.
“야~ 재영이 덕에 이런데서 하네.” 우리의 세 번째 버스킹을 시작했다.
역시나 좋았다. 거리를 지나 불어오는 바람이 어깨와 목덜미로 느껴지고,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거리를 마주하고 시원한 그늘에 앉아 음악으로 우리만의 작은 공간을 만드는 기분은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관객이 없는 것은 이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주변 상인들의 호기심어린 눈빛도 이제는 익숙해져 너스레로 웃어 줄 여유도 생겼다.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아저씨가 우리 주위로 와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펼치고 있었다. ‘오~ 우리를 BGM삼아 옆에서 장사를 시작하려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웬 캐릭터 풍선을 하나 오밀조밀 만들더니 우리 앞에 꽂아 주었다. 우린 쾌활한 웃음을 터트렸다. 무대 감독처럼 우리 무대를 장식해 주는 것 같아 그 고마움이 단전 깊은 곳에서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 후로도 한동안 주름이 깊게 패이고 그을린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박수치다 어느 샌가 바람같이 떠나 가셨다. 정말 이 곳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 같이 어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불어오는 바람 따라 행복이 가득 밀려왔다. 더 바랄 것 없이 이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즐거웠고 만족했고 행복했고 추억도 만들어 졌다 생각했다. 노래가 좀 안 맞아도 연주가 조금 어긋나도 아무 상관없이 우당탕탕 공연을 해나갔다. 사실 어차피 누구도 듣지 않고 들어도 잘 모를테니 우리끼리 신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중 우리 앞을 지나가던 어느 백인 가족 중의 꼬마 아기가 우리 앞에 꽂혀진 풍선에 관심을 보였다. 꼬마는 넘어질 듯 말 듯 뒤뚱뒤뚱 풍선 앞으로 다가와 우리 노래에 어깨를 으쓱거리면서도 눈과 손은 그 풍선을 향해 있었다. 웃음이 났다. 정황상 인지상정으로다가 풍선을 아기에게 선물 했을 법했지만 너무 뻔한 건 싫어서 그냥 웃으면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날 팁은 전혀 없었다. 준비한 노래를 끝냈다. 서로 응원을 했고 수고를 치하했다. 입이 찢어지고 속에서 무언가 튀어 나올 만큼 신나고 즐거웠다. 말로 표현하기는 너무나도 부족한 행복감이 우리 사이에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