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시장에서 만난 현지식
*5PM
각자 방에 짐을 풀고 방이 시원해지고 한숨 돌리고 나니 이미 시간은 오후 5시를 훌쩍 지나 있었다. 형은 방콕에 사는 지인과 약속이 있다며 외출 준비를 했다. 역시 글로벌한 형이다.
“8시쯤에 올게. 그 때 다시 나가자.”
“오키요~”
8시에 온다고 했으니 9시나 돼서야 들어오겠거니 싶었지만 우선은 8시에 다시 나가기로 하고 형은 외출을 했다. 우리 둘도 각자 방에서 쉬었다. 나는 우선 낮잠을 한 숨 자기로 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시원하고 쾌적한 방에서 깨벗은 채 촉감 좋은 린넨이 깔린 침대 위에서 나른하고 기분 좋은 낮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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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가 나는 낮잠이 깊이 들진 않는다. 쉬는 날 집에서 낮잠을 청해보곤 하지만 대게의 경우 30분 안쪽에서 깬다. 이날도 그랬다. 30분 정도 자고 일어나니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고 오히려 허리가 베겨 침대에 누워 있는게 불편했다. 슬그머니 큰방으로 가보니 재영이는 부러울 정도로 쿨쿨 자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기도 그렇고 기다리기 지루해 슬쩍 큰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방 안에 있는 화장대를 괜히 부스럭거렸다. 그 소리에 재영이가 깨긴 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얼굴이 아니었다. 눈은 벌겋게 충혈 되었고 얼굴엔 잠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고 정신도 못 차리는 듯 횡설수설했다.
“야, 니 더 자야겠다. 더 자. 더 자.”
“어 그래 나 30분만 더 잘게.” 다잉 메세지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재영이는 또 잠에 풍덩 빠져 드는 것 같았다.
지친 동지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난 휘적휘적 내 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봐도 인상 깊은 큰 창을 활짝 열고 바깥 풍경을 내다봤다. 높은 곳에서 멀리 보이는 풍경은 어디나 멋졌다. 역시나 창밖으로 몸이 쑥 빠져나가는 게 무서웠지만 용기내서 내다보며 오후의 여유를 누렸다. 시원한 방 안에 발을 딛고 몸을 내어 창밖으로 느끼는 이국적인 더위와 햇살의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여행자의 사치를 한동안 누렸다. 하릴 없이 침대위에 뒹굴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다시 잠을 청해 보기도 하며 재영이가 깨기를 기다렸다.
*7PM
시간은 어느덧 7시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낮은 발걸음 소리가 나는 듯 싶더니 아직도 혼이 덜 돌아온 얼굴로 재영이가 반쯤 휘청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하.....아직 나가기엔 무리인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재영이를 보며 생각했고
“야, 나가야지.” 재영이는 고양이처럼 마른세수를 하며 반도 채 뜨지 못한 눈으로 오로지 의지 하나에 의지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탐복할 만한 의지로다...내가 가끔 말했지? 존경한다고...
“니 나갈 수 있겠나? 상태 완전 안 좋아 보이는데? 좀 더 자라. 무리하지 말고.”
“아 그래?..........(재영이는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젓더니) 아 진짜 잠이 안 깨네. 너무 피곤하다. 미안, 좀 만 더 잘게.” 미안한 듯 이 말을 남기고 재영이는 다시 반쯤 휘청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형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8시에 나가기로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으면 오늘 쫑이지 머. 그래 머...이 정도면 됐어.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만족이다.’ 처음 기대하고 그렸던 그림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 버전에 타협했지만 이 만큼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고 만족스럽다 했다. 형은 늦을 거라 판단하고 근처에 가 볼 만한 데가 있나 검색을 했다. 우리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태국 문화 센터역 근처에 야시장이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마침내 재영이가 정신을 차렸다.
“야 미안 미안. 너무 피곤했다.”
“좀 낫나? 얼굴 돌아왔네. 아까 장난 아니던데 진짜.”
“어 이제 괜찮아. 아 진짜 피곤했다. 우리가 여기 와서 제대로 잔 적이 없잖아.”
“맞다. 제대로 못 잤지 계속. 안 피곤하면 그게 신기한 거지.”
엉망이 된 생활 리듬에다 수면 시간도 많이 부족했다. 이 여행이 끝난 뒤에 며칠 간 앓아 누워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형 연락 없으니까 우리끼리 저녁 먹으러 가자. 근처에 야시장 있단다. 거기 가서 구경하고 저녁 먹자.”
“오 그래? 야시장 좋지.”
“지하철 타고 가자.”
- 형 오늘 그냥 접고 놉시다. - 출발하기 전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재영이와 난 올라올 때와 같은 루트로 건물을 빠져나와 처음으로 BTS라고 하는 방콕의 지상철을 타고 태국 문화 센터역으로 이동했다. 택시만 타고 다니다 개찰구에 코인을 넣고 환승을 해가며 대중교통을 타니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태국전통문화역에 도착해 야시장의 방향을 찾으려 두리번 거리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쪽이 야시장이려니 해서 사람들 무리를 따라가 보니 역시나 그곳에 야시장이 있었다. 넓은 공터 같은 곳에 수많은 천막들과 불빛들의 군집. 그 주위로 설치된 2층의 루프 탑 술집들과 커피숍들이 둘러져 있었다. 야시장의 활기가 밤의 공기와 어우러져 낭만적이고 운치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수많은 음식점과 각종 상점들이 사람이 겨우 왕복으로 지나갈 공간 만 허락한 채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대충 웬만한 길거리 음식 종류는 다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바로 보이는 2층의 루프 탑으로 올라갔다. 띄엄띄엄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술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커다란 대야 같은 잔에 칵테일을 받아 놓고 홀짝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도 전망을 보기에 유리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길을 멀리 두고 있자니 부드러운 밤바람이 불어와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풍경도 무척이나 예쁘고 아기자기 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아 종업원이 곧장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서 칵테일 한 잔하며 앉아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낭만 서린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와 재영이는 배가 많이 고팠다.
“아 여기 식당은 아니네. 음...어쩌지? 밥을 먹고 올까 아니면 걍 술을 바로 먹을까?”
“그래도 밥을 먹을까?”
“그래, 일단 밥을 먹자. 너무 배고프다. 아까 입구 쪽에 식당 있던데 현지 식사 한번 하자.”
“그래, 밥 먹고 다시 오자.”
아무래도 배가 고팠다. 일단 식사가 될 만한 걸 먹고 다시 돌아 와서 술을 먹기로 하고 루프 탑을 나섰다.
동남아에 왔으면 해산물은 한 번 정도 먹어 줘야 한다며 입구 쪽에 있는 오렌지 색 간판이 예쁜 해산물 식당으로 갔다. 밖에 나와 있는 우리나라의 포차 테이블 세트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이 집에서 제일 잘 나가는 메뉴인 것으로 가늠되는 해산물 세트를 주문했다.
“아 겁나 배고프다.”
“밥 먹으러 오길 잘했다.”
“여기 오니 밥상 앞에 앉으면 엄청 배고파져.”
“오늘은 어떻게 되는 거야?”
“시간이 이런데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 하는 거지 머.”
20여분 가량 기다린 끝에 음식이 나왔다. 반가움 가득한 우리 면전에 정확한 학명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굴류, 새우류, 조개류의 해산물이 면류와 함께 버무려져 크게 한 접시 나왔다. 뜻 깊은 생각과 갸륵한 마음으로 주문한 것이라 시각적인 낯섦을 차치하고 대차게 포크로 면류를 돌돌 말아 잊지 않고 굴류도 한 점 찍어 입에 딱 넣고 첫 입을 오물거리고 나니 밀려오는 놀라울 정도로 입에 맞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재영이와 나는 서로 아연실색한 얼굴을 마주했다. 정말 방콕 날것의 생소한 맛...현지의 맛 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아서 내 입에 맞는지 안 맞는지 조차 판단해 본적 없는 그런 완벽하게 내 혀에 brand new 한 맛이었다. 각종 양념과 식재료의 생생한 맛이 하나하나 온전히 살아있는 것 같은 해산물 그대로의 맛이다, 이 정도라면 정말 재료 본연의 맛을 1도 잃지 않은 요리 중의 요리가 아닐까, 요리사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 라고 그 짧은 시간에 생각했다. 진정한 방콕 속살의 맛인가 싶었다. 그러다 불현 듯 걱정이 들었다.
“야 근데 이거 먹어도 되겠나? 막...우리 적응 가능 하겠나?”
“갑자기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 왜 현지에 적응 된 사람들만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있잖아.”
“걍 내일 설사 좍좍하면 될라나?”
“안 그래도 더운 나란데... 우리 괜찮을라나?”
“배 아프고 죽죽 내리면... 좀 피곤한데...”
“쓰읍...걱정이 되긴 되네...”
음식 맛이 입에 맞지 않은 탓에 핑계를 대는 것만은 아니었다. 정말 갑자기 걱정이 됐다. 갑자기 밀려든 걱정과 의외로 적응에 실패한 맛 탓에 면만 좀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식사를 마쳤다. 그러던 중 형에게 메세지가 왔다.
-야 어디냐? 나 좀 있으면 숙소 들어갈껀데-
-우리 밥 먹으러 나옴.
-얼마나 걸려?
-이제 나왔는데. 1시간 쯤 뒤에 숙소 앞에서 봅시다.
-오키.
숙소 열쇠가 하나 밖에 없던 터라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경우에 불편했다. 10시 쯤 숙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앞에서 도착해 보니 상민이 형이 건물 입구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바로 나갈까?”
“어디? 버스킹 하러?”
“어.”
“아까 얘기 끝낸 거 아니었음? 오늘 버스킹은 끝난 거로?”
“그래? 난 버스킹 하는 줄 알고 온 건데?”
“시간이 너무 늦었지 않나?”
“머 어때?”
“하긴 상관은 없지만...”
사실 시간은 상관 없었지만 사실적으로 시간이 꽤나 늦었고 이미 마음을 접었던 터라 다시 마음을 잡으려니 좀 내키지 않았다.
“그냥 오늘은 클럽가고 놀고 내일 합시다.” 상황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내일 합시다.’ 라는 얘기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입에서 나왔다.
“그래? 그럼 그러자.”
이번에는 오후에 집 주인이 알려준 건물 외부에서 한번에 20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상민이 형은 따로 회사 일을 좀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형을 홀로 두고 나와 재영이는 나가 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