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 3월 4일
흐린 날 잿빛의 햇살도 눈에 거슬리는 나른 한 일요일 오후라면 게다가 감기 기운일지도 모를 무기력함이 더해지는 날이라면 낮잠을 자고 싶어진다. 침대에 누워 낮잠을 청하려니 조금 멋없어 보여 소파에서 뒹굴 거리다 어느 순간 편안함이 느껴지는 자세에 맞닥뜨리면 한 숨 푹 자고 일어나고 싶어진다. 잠깐만이라도 잠이 들고 나면 몸이 개운해 질 것 같지만 잠이 들진 않는다. 정신은 아득하고 무언가 멀어져 가는 듯 하지만 잠이 들지는 않는... 무의식에 가까운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 머물게 되면 억지로 의식을 잠으로 밀어 넣어 본다. 마치 작은 김치통에 덩치 큰 포기 김치를 구겨 넣듯이...
*11AM
오전 11시 쯤 눈을 떴다. 깊이 잔 덕분인지 피곤하진 않았다. 그게 아니면 역시나 여행이 주는 활력일 것이다. 둘은 어제 나보다도 늦게 잔 듯 했지만 곧 다들 일어났다. 상민이 형의 업무 특성 상 갑자기 일이 생기기도 하는 탓에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형은 오후 4시쯤 일이 끝날 것 같다며 그 때 나가자고 했다. 재영이도 어제 할 일을 다 못했다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혼자 점심을 먹으러 다녀오기로 했다. 혼자 나가서 먹고 오려니 좀 미안한감도 없진 않았지만...뭐 어쩔 수 없지.
무리 지어 온 여행이지만 때론 혼자만의 여행을 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오히려 신선하다. 마침 숙소 근처에 있는 terminal 21이란 쇼핑몰에 가서 구경도 좀 하고 점심을 먹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꼼꼼히 썬 크림을 바르고 썬글라스를 살뜰히 챙기고 미리미리 길을 알아보았다. 로밍을 하지도 않았고 유심 칩을 사서 끼우지도 않은 나는 혹시나 길을 잃을까 신경 써서 길을 익혀두었다. 숙소를 나선 뒤 바로 우회전에서 줄창 직진.
“나 나갔다 올게~”
“그래 맛있는 거 먹고 와라.”
화창했다. 쨍하진 않았지만 썬글라스가 잘 어울릴 만큼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다. 일행을 두고 혼자 나선 발걸음은 약간 어색했지만 그 보단 설레임이 훨씬 컸다. 이어폰을 통해 꽂히는 늘 듣던 노래도 새롭게 들렸다. 나는 미리 알아 두었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신경 쓰면서 주위의 큰 건물들을 기억해두려고 애쓰며 걸었다.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 주로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이 많지만 사실 혼자 여행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주위 경계도 심해지고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과 고독감을 많이 느낀다. 혼자 밥 먹는 것도 힘들고 홀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 혼자 여행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안 가는 것 보다는 혼자서라도 가는 편이 좋겠다 싶어 항상 큰 마음을 먹고 여행을 가곤 하고 되도록 이면 동행을 찾는 편이다.
며칠간 셋이서 북적이다 맞이한 혼자만의 시간은 신선하고 상쾌했다. 부부끼리의 여행에서도 잠깐씩 각자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신나는 발걸음으로 terminal 21에 도착했다.
BTS라고 하는 방콕 지상철과 연결된 쇼핑몰로 규모가 엄청났다. 정말 방콕은 대형 쇼핑몰이 많은 것 같다. 아래층은 주로 쇼핑 공간이고 위층으로는 유명한 도시들을 테마로 한 식당가가 위치해 있었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실내는 시원했다. 썬글라스를 벗고 실내를 구경했다. 일층에서 단번에 높은 곳까지 연결된 길게 뻗은 에스컬레이터가 놀이기구 같았다. 타고 올라가며 내려다보는 실내 전경도 재밌었다. 꼭대기 층에는 영화관과 게임 공간도 있었다. 이리저리 하릴없이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다 역시 태국에 왔으니 태국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마땅한 논리로 태국 음식을 파는 곳으로 들어갔다.
혼자 오면 여러 음식을 시켜보기가 어려워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지만 그런 것은 내가 많이 먹으면 된다 하는 생각으로 똠양꿍과 볶음밥 종류로 두 가지 메뉴를 주문했다. 똠양꿍 참 열심히도 먹었다. 종업원이 가격 행사 중이라며 주스도 한 잔 추천하기에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난 물을 주문했다. 난 원래 물을 좋아한다.
혼자 먹기엔 좀 많은 양이었음에도 깔끔하게 두 그릇을 모두 비웠다. 똠양꿈은 카오산 로드 근처의 골목에서 먹은 것보다 훨씬 맛의 깊이가 없고 무언가 허전했다. 상업성에 물든 똠양꿍은 그럴 거야 하는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잘 먹었다. 포만감을 그득 안고 식당을 나오니 커피 한 잔 생각이 간절해 졌다. 역시 삶의 루틴이란 진하다. 돌아다니던 중에 치즈 케익이 참 맛있어 보여 배고파할 우리 동지들에게 사다 줄까 하는 친절한 생각을 아주 잠깐 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로 잡았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여 들어갔다. 쓱 둘러보고 그냥 나왔다. 과일 주스 가게를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딸기 주스 한 잔을 사서 빨대를 꽂아 입에 물고 건달처럼 돌아 다녔다.
쇼핑몰 1층을 둘러보다 쇼핑몰에서 주최하는 오픈마이크 행사를 준비하는 밴드를 보았다. 악기를 살피고 가벼운 리허설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우리도 이런 데서 공연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잠깐 부러움 섞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그 중 마이크 테스트 중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몰래 엿보다 들킨 듯이 괜히 황망히 돌아서 내 갈 길을 갔다. 건물 밖으로 나가 보니 BTS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서 혼자 바이올린 버스킹을 하는 태국 남학생이 보였다. 여기 저기 음악이 넘치는 곳이다.
‘이제 우리 버스킹은 끝인가?’ 다들 버스킹에 대한 허기는 어느 정도 채워진 듯 했고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빠 보였다. 나 역시도 어느 정도의 갈증은 해소가 된 터라 준비할 때 만큼의 열망은 약간 가셔서 ‘이제 설렁설렁 놀다 가지 머.’ 하고 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오는 길에 슬쩍 근처를 둘러보니 곳곳에 버스킹 하기에 적당해 보이는 곳이 많아 보이긴 했다.
신경써서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환기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둘은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점심은 먹었어들?” 약간의 미안한 마음에 내가 물었다.
“안 먹었지. 넌 머 먹었냐?”
“그냥 볶음밥에 주스하나 먹고 왔어요.”
“배고프다.”
“컵라면이라도 먹지. 사다 놓은 거 있는데.”
“그럴까?”
“재영아 먹을래?”
“그래요!” 둘은 물을 올려 컵라면을 먹었다.
“4시 쯤 끝날 것 같으니까 그 때 나가자.”
“오키요.”
기대감 없는 대답을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둘이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난 침대 위에서 뒹굴 거렸다. 한가한 오후였다. ‘좀 더 돌아다니다 들어올걸 그랬나?’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다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 핸드폰을 만지작만지작 그러다 아뜩히 잠이 들었다 깼다. 몸이 근질거렸다. 재촉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말은 못하고 괜히 집 안을 돌아다니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어슬렁 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시간은 이미 오후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어제에 이어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오후 5시가 다 되어갈 무렵 상민이 형이 드디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며 큰 소리로 얘기했다.
“와 끝났다. 나가자!” 기다렸던 말이지만 부러 느릿느릿 움직이며 말했다.
“슬슬 가면 되나?”
“자!자! 빨리 준비하자!”
재영이도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 쪽을 돌아봤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다시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우릴 기다리게 했던 상민이 형이 어서들 준비하라고 오히려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