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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Apr 16. 2021

제왕절개 수술 후 방광이 손상되었다.

-1-

수술 부작용


모든 수술은 수술을 하기 전에 부작용을 명시한다. 그런데 내가 그 부작용을 제대로 들은 적이 있었던가? 대게는 내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여겼던 거 같다. 특히 한 번 한 수술이라면.


제왕절개 후 전신마취가 풀리며 병실에서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하얗게 질려있는 신랑의 얼굴이 보였다. 두 시간이 지나도록 내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날 기다렸을 신랑을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의사 선생님이 들어왔다. 정말 위급했다고 한다. 배를 절개했는데 방광과의 유착이 너무 심해 손을 넣을 공간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자궁을 꺼내지 못하고 뱃속에서 방광과 함께 절개해서 아이를 꺼냈다고 했다. 


그때가 두 번째 제왕절개였지만 자궁을 밖으로 꺼내서 그걸 다시 절개하고 아기를 꺼내는지 처음 알았다. 안 그래도 마취가 덜 깨서 정신이 없었는데 그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소변줄과 함께 내 배를 관통하는 가느라단 줄이 보였다.  줄의 끝에는 새빨간 피가 모여 작은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아직 마취도 덜 깬 내게 셋째는 무조건 대학병원에 가서 낳아야 하며 가서도 목숨을 걸고 낳던지 목숨을 내놓고 낳아야 한다고 했다. 내 건강을 생각하면 셋째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주일의 입원. 조리원까지 소변줄을 꼽고 가다


보통 하루가 지나면 소변줄을 뽑고 걷는 연습을 한다. 그래야 뱃속 장기가 제자리를 찾고, 가스도 나온다. 가스가 나와야 물이라도 마실 수 있다.


난 수술 다음날이 되어도 소변줄을 뽑지 못했다. 그래도 걷기 운동은 운동대로 또 해야 했다. 가스가 나와야 물이라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꼬박 이틀 밤을 보내고 나서야 물이라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회복이 유독 느렸다.  속옷을 갈아입는 것도 힘들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소변줄을 잠그고 소변주머니에서 옷을 분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하루 이틀 만에 끊는 항생제를 나는 계속 달고 있었다. 팔꿈치 안쪽에 하다 핏줄이 터지니 나중에는 손등까지 사정없이 꽂는 통에 정말 멍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두 팔과 손등은 멍 투성이었다.


아이를 보러 신생아실에 갔을 때 나만 모유수유를 하지 못했다. 소변줄을 달아서, 항생제가 들어가서, 링거를 맞고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그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유리창 너머로만 봐야 했다.


한 번도 안아주지 못한 내 아이가 가엾어서 안아보기만 하겠다고 사정을 하는데도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내 손의 링거 바늘 때문에 힘이 안 들어가 아이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거였다. 서럽고 원통했지만 또 한편으로 정말 그럴지도 모르니 아이를 향한 미안한 마음을 속으로 꾸역꾸역 삼켰다.


병실 복도를 걷고 있으면 산모들과 보호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이를 보러 면회시간에 가면 몇몇 보호자들이 내게 왜 아직도 링거를 꽂고 있는지, 왜 소변줄을 달고 있는지 물어봤다. 안 그래도 속이 상한데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아 대답을 얼버무렸다. 


소변줄이 막힌 날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소변주머니가 차지 않는 기분이었다. 배가 아프지는 않아서 기분 탓이겠지 했는데 배가 점점 불편해지더니 소변이 조금씩 새는 느낌이 들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소변줄을 손으로 잡고 자리를 잡는다고 이러저리 흔드는데 내 정신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소변줄을 오래 끼고 있어 소변줄이 닿는 곳은 다 헐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방광 기능을 테스트하는 작업도 이어졌다. 소변줄을 잠그고 요의가 느껴지는지를 내게 말해달라 했다.  어는 정도까지 방광이 차야 테스트를 할 수 있다며 최대한 오래 참으라고 했다. 계속 물을 마시면서 참는 걸 해야 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냐면 몸을 베베 꼬며 지금 당장 나올 것 같을 때까지 이다. 그 상태로 다른 층에 있는 진료실까지 가는데 갈 때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었다. 걸을 때마다 금방이라도 소변이 쏟아질 거 같았다. 내일 테스트를 한다고 미리 알려줄 때마다 나는 벌써 긴장이 돼 속으로 덜덜 떨고는 했다.


모유수유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뿌옇다 못해 노른자같이 노란빛이 나는 초유를 짜서 버릴 때 나는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에게 꼭 먹여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 후로도 나는 조리원에 갈 때까지도 모유 수유는커녕 그 작고 가냘픈 아이를 내 손으로 안아보지도 못했다. 설상가상  젖몸살이 왔다. 뼈마디가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온몸이 아팠고 온 몸이 홀딱 젖었다. 가슴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끙끙 앓았다.


조리원에 가기 전날 피주머니를 빼고 조리원에 가는 당일에 항생제를 투여하던 링거도 뺐다. 이제 약으로 먹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 두 가지만 뺐는데도 몸이 홀가분해져서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변줄만은 달고 가야 했다. 소변줄이 스치는 모든 곳들이 헐어서 걷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유발됐다. 그리고 소변줄이 쉽게 빠질 수 있다고 되도록 가만히 있기를 권장했다. 걷기 운동도 이제는 사치가 돼버렸다.


짧은 조리원 생활


조리원 계약기간은 2주였다. 첫째가 눈에 밟혀서  조리원을 가지 않으려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가 거셌다. 몸조리도 시기가 있다고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하다며 꼭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보니 소변줄을 단 채 집에 갈 수가 없으니 올 수밖에 없었다. 소변줄을 단 채 병원과 연계된 조리원으로 갔고 소변줄이 스칠 때마다 통증은 더 심해졌다.


조리원에는 제대로 된 의료인력이 없었다. 불안하던 차에 소변줄이 다시 막혀버렸고 온 몸이 식은땀으로 덮인 후에야 통로로 연결된 옆 건물 병실로 옮겨졌다.


다시 소변줄을 뺐다 꽂았다 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나는 병원 침대에서 사이드 레일을 붙잡고 오열했다. 후덥지근한 여름날이었는데 급하게 배정된 다인실에는 에어컨도 없었다. 안 그래도 소름 끼치게 아픈데 더워서 흐르는 땀까지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의사 선생님한테 이제는 소변줄을 뽑아도 되지 않냐고, 이제 정말 더 이상 꽂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다.


소변줄을 뽑기 위해 그날 밤을 병동에 있으며 소변참기 테스트를 했다. 강제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야 했지만 이 소변줄만 뺄 수 있다면 다 참을 수 있었다.


새벽 6시쯤 테스트에 통과한 나는 의사 선생님의 걱정 어린 표정을 뒤로하고 소변줄을 뺀 채 조리원으로 금의환향했다. 이제는 수유도 할 수 있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고 더군다나 큰 침대에서 맘껏 뒹굴뒹굴 구를 수도 있게 되었다.

난 자유였고, 너무 개운하고 홀가분해서 날아갈 것 같았다.


하루 뒤, 하루 종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큰 폭발음과 함께 보고 있던 티브이도 조리원 방에 불도 다 나가버렸다. 일제히 산모들이 조리원 방문을 쾅쾅 닫으며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건물에는 불이 켜진 곳이 없었다.


산모들은 일제히 아이가 있는 신생아실로 달려갔다. 몸이 덜 아문 것도 개의치 않고 계단을 두 계단 세 계단 뛰어넘으며 아이의 안전을 살피기 위해 뛰어갔다.


신생아실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습도가 높아서 후덥지근한 여름날 오후 신생아실에는 전기가 끊겨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기들이 놓여있었다. 지하에 있던 발전기가 침수되면서 터졌다고 했다. 신축건물이라서 지은 지 몇 개월도 안 되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신생아실 담당 선생님께 수유실로 아이를 데리고 나와달라 했다. 나와 같이 조리원에 있던 산모들 불도 꺼지고 에어컨도 안 나오는 수유실에서 아기를 안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하던 때라 서로 떨어져 앉고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몇 시간을 그렇게 있다 보니 조리원에서 산모들끼리 가장 말을 많이 한 날이 됐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병원의 통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 병원장님이 와서 정말 죄송하다며 다른 곳들도 폭우로 접수가 많이 들어와 내일이 돼서야 전기를 고치러 올 수 있다고 했다. 다들 오늘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함께 했다. 다음날이라도 고쳐지면 다시 와도 좋다고 했지만 그날 집에 가는 병원 주차장에서 비릿하게 나는 석유 냄새에 를 맡았다. 이 불안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당장 집에 가서 먹일 분유도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조리원에 있는 걸 여분의 젖병에 담아 갔다.


그렇게 소변줄을 빼고 이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겠다 했을 때 아기를 안고 집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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