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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Jun 19. 2021

칭찬을 하다 말고 자살골을 넣고 말았어.

7살 아이를 키우며 절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감정 기복이 심하구. 그리고 내 목소리 이렇게 구나다.


아이가 예뻐 못살다가도 아이를 채근하거나 혼을 내 모습.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거 같다. 내 목소리에 내가 흠칫 놀랄 만큼 말이다.


그러다가 또다시 홀린 듯이 아이를 붙잡고 칭찬을 하고 있는  본다.


도대체 이 중에 진짜 나는 누굴까?


우리 집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이지만 그런 내가 내게는 전히 낯설다.


각각 다른 상황에서 저런 일들은 나도 모르게 나오 그런 내 모습 엄마로서 많은 생각이 게 한다.


우리 첫째가 이렇게 이쁜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픈데  나는 왜 그토록 내고 싶지 않은 짜증과 화를 내게 될까. 


유치원 보내기 전,

"아유. 우리 아들 일어날 때 짜증도 안 내고 일어나서 착하게 옷도 잘 입고 너무 잘하네." 하며 안고 뽀뽀를 다.


는 밥을 몇 번 먹여주다 혼자 먹으라고 하고 등원 준비를 하러 간다.


수저세트, 간식통, 물통을 챙기고 씻고 옷 갈아입고 왔는데 한 숟가락도 먹지 않은 걸 발견하면 그때부터 말투에 짜증이 섞이게 된다. 그 이후에도 아이가 누워있거나 밥은 안 먹고 티비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채근을 하게 되고 화도 내게 된다.


사실 생각해보면 몇 숟갈 덜 먹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도 아닌데, 진짜 별 거 아닌 건데 난 왜 화를 내게 될까.


아침에 일어나 입맛도 없을 텐데 반찬 투정하지 않고 주는 것만 받아먹어도 대견하게 생각하고 예뻐할 수 있는 건데 나는 왜 아이에게 더 큰 걸 바라고 있을까.


아이가 한 숟갈을 먹더라도 대견하게 생각하고 그 모습을 예쁘게 바라봐주고 칭찬해주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은데...


근데 이런 생각이 그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고, 꼭 시간이 지나서야만 떠오른다. 그래서 후회할 일을 내 스스로 만들게 된다.


유치원 차를 타는 시간이  임박해지면 혹여나 아이가 유치원에 가서 기가 죽어있거나 속이 상한 채로 있을까 봐 사랑한다고 잘 지내다 오라고 다시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아이를 대한다.


이럴 때도 있다.


방금 전까지 해도

"어머, 동생을 이렇게 돌봐주는 착한 형이 세상에 어디 있어. 우리 아가밖에 없을 거야. 너무 사랑해." 하며 고마운 마음과 사랑이 가득 담긴 긍정적인 말들을 다.


그러다

"엄마, 나 휴대폰 하고 싶어."라는 아이의 한마디에 바로 정색을 하며 오늘 벌써 몇 번째냐고 안된다고 한다.


그래도 아이가 조르면 맨날 그렇게 핸드폰 시켜달라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결국 화를 내고야 만다.


아이니까 조르는 거일 텐데. 평소에 동생을 잘 보살펴준다고, 춤을 추며 애교를 부려서 등등의 이유로 휴대폰을 먼저 건네기도 하면서 저때는 무슨 이유로 저렇게 단호하기만 할까.


아이가 내게 또다시 휴대폰을 바라는 게 내가 줏대 없는 기준으로 아이에게 핸드폰을 건네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꼭 시간이 흘러야 하게 된다.


여러 번 반복되는 일이라도 아이가 크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은 채 알아듣게 잘 얘기해주면 되는데. 내게는 그런 인내심이 부족하다.


또 나는 걸핏하면 아이에게 그런 사람이 어디있냐고 말한다.

그 말을 할때면 꼭 과장 덧붙다.


밥을 돌아다니며 먹느라 늦게 먹는 아이를 보고


"세상에 밥을 그렇게 오래 먹는 사람이 어딨어. 벌써 한 시간이 지났어. 돌아다니니까 지금까지 안 먹고 그렇게 있지."하고 말한다.


아이는 내 채근에 버퍼링이 걸릴 때가 많다.

내가 혼을 내며 대답을 하라고 재촉을 하면 날 보며 눈만 멀뚱멀뚱 뜨고 아무 대답을 못한다.


그리 오래 그러고 있는 것도 아닌데, 기다리다 보면 무슨 대답이라도 할 텐데.

왜 아무 말이 없냐며 같은 말을 반복하며 보채는 내게 아이는 겨우 한마디를 건넨다.


"엄마,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그런 건데 조금만 기다려줘."하고 말이다.


어른인 나조차도 누군가가 갑자기 채근을 한다면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고 머리 속이 하얗게 돼버릴 거 같은데, 저 작은 아이가 어른인 내가 거기다 화까지 내면서 채근하는데 바로 아무렇지도 않게 꼭 맞는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기다려줄 줄 아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아이의 체력은 지치는 순간이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데 둘째 아이 때문에 잠 설친 날이면 하루 종일 힘도, 정신도 없다.


첫째 아이는 나와 모든 걸 함께 하고 싶어 하는데 그럴 때면


"엄마 힘들어서 못 하겠어."라는 말을 조금 자주 한다.


그건 사실 엄마인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말인데 반복되다 보니 그 말을 할 때 미안함이 섞인 투가 아닌 지친 투로 얘기해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아이를 키우며 안돼라는 말도 입에 붙었다.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


7살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해도 되는 거 같아 하게 되는 일들이 어른인 내 눈으로 바라보느라 안 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아이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이 부족하면 아이의 호기심으로라도 이해를 하고 드넓은 마음으로 바라봐줘야 하는데.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위험한 게 아니라면 하게 둬도 되는데.


먼저 나서서 안돼를 외치는 나는 아이의 상상력을 누르는 엄마다.


살면서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불평불만을 가지지 말아라고 얘기하면서 본인은 안된다는 얘기만 하면 아이에게 그 안 돼가 와닿기나 할까?


안돼라고 딱 잘라 말하기 전에 우회해서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생각해보는 것. 물어보는 당시에 해 줄 수 있는 다른 놀이를 모색하는 것. 그게 내가 육아를 나갈 때 필요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내 감정이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선 듯 휙휙 돌아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몰랐었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내가 그랬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그러는 건  위한 몸부림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기도 했다. 

럴때면 내 스스로 짠했다.

하지만 내편을 드는 건 딱 거기까다.


나는 아이를 위해 많은 부분을 고쳐야 하고, 아이의 속도에 맞춰 걸어야 한다.


나도 진심으로 아이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어지는 길을 숨차게 달리며 잡기놀이를 해주고 싶다. 


더  이상 쓰지 않은 단어를 고를 수 없을 만큼 끝말잇기도 하고 싶다.


아이의 마음이 충족될 때까지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들로 추억을 한가득 만들어 주고 싶다.


그런데 그게 왜 이리 힘든 걸까.


둘째가 자주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해주는데도 끝도 없이 또다시 또다시 바랄 때면 그리고 안 될 때 짜증이나 화를 내는 아이를 볼 때면 자꾸 인내심이 바닥난다.


조금만 더 있으면 엄마하고 하는 끝말잇기보다 친구와 노는 게 더 재미있을 거고, 엄마와 하는 닌텐도보다 친구와 하는 컴퓨터 게임이 더 재미있는 날이 올 텐데. 


옥상정원에서 하는 엄마, 아빠 놀이보다 정말 엄마, 아빠가 된다면 어떨까 하고 한 번쯤 상상하게 되는 여자 친구와의 시간이 덜 즐거운 날이 올 텐데. 


그때까지만 엄마인 내가 최고의 친구가 되어서 신나게 놀아주면 되는데. 왜 그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


원래 최고의 친구가 되어주려면 늘 후회와 반성이 뒤따르는 걸까.




다행히 7살 첫째 아이는 여전히 신랑을 보며


"아빠! 왜 엄마랑 결혼했어. 엄마는 나랑 결혼해야 하는데." 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는 내가 아빠 닮았다고 하는 말을 하면 엄청 팔을 휘휘 저으면서


"아니야. 나 엄마 닮았어. 나 엄마 닮았어."하고 꼭 날 닮았다고 한다.


요즘 차로 이동을 할 때 위인전을 즐겨 듣는 아이가 하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커서 위인이 될 거야. 위인이 돼서 엄마 소원을 이루어 줄 거야. 목숨을 바쳐서라도 엄마의 꿈을 이루어줄 거야"하고 말이다.


나는 너무나 감동했고, 가슴이 벅찼다.


내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신랑이 궁금했는지 아이에게 물었다.


"왜 목숨까지 받치려고 하는 거야?" 


그러자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아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가족이 좋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우리 첫째는 이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모를 만큼 생각도 깊고 의젓하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크다.


인사성이 밝아서 지나가는 어르신들을 보면 모르는 분이라도 고개를 숙여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쌈바춤을 추어 우리를 기쁘게 해주기도 하고 웃게 하기도 한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흥덕분에 "찐이야"와 "네가 왜 거기서 나와"를 진지하게 불러서 포복절도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첫째인데 이런 아이에게 크면서 생채기를 내고 싶지 않은데.


나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아이에게 정말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엄마가 되고 싶다. 커서도 내가 친구처럼 편하게 느껴 저서 학업이나 교우관계에서 생기는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 커피숍에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가고 하는 그런 편한 관계가 되면 좋겠다.


그러려면 내가 잘해야 할 텐데.


나는 앞으로 아이에게 울컥할 때마다 내가 내뱉을 말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질 것이다.


"너한테 그런 말투로 그런 말을 하면 넌 좋겠니?"


이 물음에 "아니. 나 싫어."라는 부정적인 답이 돌아온다면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사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니까. 내가 들었을 때 싫은 건 다른 사람도 싫은 거니까.


더군다나 내가 그러고 있는 사람은 내 목숨보다도 더 귀한 나의 아이라면. 


아이도 인격이 있고 자존심이 있다. 어른보다 더 연하고 부드러워서 다른 말로는 순수 그 자체여서 그것을 더 부드럽게 다루며 지켜줘야 한다. 가장 가까운 엄마가 하는 말은 뇌리에 더 오래 남는다.


나는 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다.


좋은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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