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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Jan 06. 2021

외할머니가 주고 간 선물

119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도로를 집어삼켰다. 차 안에서 나는 쓰러진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펑펑 울면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제발. 아직 해드린 게 하나도 없는데 절대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내가 지금 이 손을 놓으면 당장 눈앞에서 할머니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 같았다. 할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 왔을까 봐 너무 무서웠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도 할머니는 의식이 없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평소와 같이 정정했던 할머니의 모습이 영겁의 시간이 지난 거 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일상의 평온함이 깨지는 순간 주변의 풍경들은 색을 잃고 온 거리가 냉소를 뿜어내는 거 같았다.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에 마음이 베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물이 흐르고 콧물이 쏟아져 나와 휴지로 연신 닦아냈다. 눈 밑에서부터 코 밑까지 벌겋게 헐어있었는데 할머니가 기적처럼 눈을 뜨고 나서야 눈 밑에서부터 따끔따끔한 촉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할머니의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치매도 꽤 오래전부터 진행된 거 같다고 말했을 때 가슴이 철렁하고 떨어졌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치매 시라니. 쓰러지기 전에 전조증상이 분명 있었을 텐데. 내가 태어난 후부터 평생을 함께 살았는데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내가 미웠다. 뇌출혈로 할머니는 왼쪽 팔과 다리의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일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외삼촌, 외숙모들이 우리 집에 모여 할머니의 거취에 대해 의논을 했고 요양병원에 모시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나는 할머니를 이대로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내가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다. 당장에 기저귀부터 갈 수 있겠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우리 가족이 힘들까 봐 내가 겁을 먹고 포기하길 바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나와 할머니는 계속 한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가 아프신 후로 나의 일상도, 우리 가족의 일상도 180도로 바뀌었다. 기저귀를 차고 있는 가족이 있을 때 집에서 나는 냄새는 실로 끈질겨서 기저귀를 수시로 갈아도 방 벽지에도 방바닥에도 스며들었다. 현관문을 열면 묵직한 냄새가 우리를 먼저 반겼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자유롭던 일정들이 발을 묶인 채 기약 없이 우리를 기다렸다. 평일에는 요양보호사님이 오전에 오셨다 오후에 가셨지만 그 외에 시간은 엄마와 나의 차지였다. 주말은 온전히 우리 가족이 할머니를 모셔야 했다. 엄마는 쉬는 날 없이 평일에는 퇴근하고 할머니를 돌보고 주말이 되어도 할머니를 돌보느라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어하셨다.
할머니의 치매가 중증에 달했을 때 할머니는 밤만 되면 문밖에서 할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셨다. 그 무렵 할머니는 아이처럼 환한 얼굴로 할머니가 어렸을 적 엄마, 아빠와 함께 지낸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는데 나가시려는 걸 말리면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엄마가 부른다고 꼭 가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가족을 위해서든 할머니를 위해서든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바깥 활동을 하는 엄마에게 짐을 지을 순 없었다.


나는 휴학을 결심했다. 앞으로의 나의 목표나 거취보다 나는 할머니가 더 소중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할머니를 곁에서 돌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이 얼마가 되든 간에 할머니를 모신다고 쓴 시간이 후회될 거 같진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를 돌보지 않고 내 잇속만 챙긴다면 나는 평생 두고두고 후회를 할 거 같았다.

나는 밤이 되면 할머니 방 문 앞에 탁자를 놓고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며 보초를 섰다. 할머니가 깨서 나가려고 하시면 할머니 곁으로 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내게 해줬듯 할머니의 가슴을 토닥토닥해 드렸다. 할머니를 말리지 못해 현관문까지 간 날은 문을 열어 밖이 깜깜하고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드려야 했다. 아침이 되면 요양보호사님이 오셨고 나는 그제 서야 눈을 부쳤다. 일어나서는 할머니와 오롯이 하루를 함께 보냈다. 지금은 내가 함께 있지만 평상시 혼자 계셨을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혼자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 우리 가족은 바로 길만 건너면 재래시장이 있는 주택에 살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목욕탕에 가서 한 주간 묵은 얘기를 나눴고 시장 한편 공원에서는 가득 핀 꽃과 나무를 보며 콧바람을 쐬기도 했다. 활력이 넘치는 시장을 다니며 철마다 바뀌는 채소와 과일을 고르고 찬거리를 사는 것도 즐거워하셨다. 한복집은 거의 매일 가시다시피 했는데 50을 조금 넘긴 한복집 여사장님을 필두로 할머니와 같은 연배의 할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장소였다.


그러다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이사 온 지가 3년이 넘었는데 할머니가 단 한 번도 혼자서 외출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똑같이 생긴 현관문 중에서 우리 집을 찾는 일도,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여는 것도 할머니에게는 출구 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거 같이 힘든 일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내가 4살이 될 무렵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나에게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어 주셨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가 필요했고, 엄마가 필요한 순간마다 떨어지기 싫다고 울며, 떼쓰기를 반복했다. 출근하는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방 앞에서 현관까지 매달려 가보기도 하고, 그 앞에 앉아서 발을 굴리며 울기도 했다. 엄마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목이 쉬고, 씩씩대거나 슬퍼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늘 외할머니가 계셨다.

외할머니는 잔뜩 뿔이 난 내 볼과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고, 나를 무릎에 눕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는 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나는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이야기에 잔뜩 집중해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같이 숨바꼭질도 하고 잡기 놀이도 하며 할머니는 늘 내 곁에서 시간을 보내주셨다. 그러다 다시 엄마를 찾으며 칭얼거리면 혼자서 포대기로 나를 가뿐히 업어주셨다. 그때 할머니의 등은 너무나 넓고 포근해서 나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내가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고 열이 날 때면 할머니는 시장에 가서 가장 크고 싱싱한 배를 사 오셨다. 배의 윗부분을 잘라 뚜껑을 만들고 숟가락으로 배의 속을 다 긁어내셨다. 그리고는 그 속에 꿀을 넣고 움푹한 그릇에 넣어 그 그릇을 또 냄비에 넣어 오랜 시간 끓여내셨다. 배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고 배에서 즙이 나와서 배를 긁은 자리는 꿀과 배 즙으로 가득 찼다. 나는 할머니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뜨거운 걸 후후 불어가며 떠먹곤 했는데 그럼 땀이 줄줄 나고 감기가 뚝 떨어졌다.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날 밤이면 할머니의 품에 꼭 안겨서 할머니의 온기를 느끼며 잠이 들었고, 할머니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할머니의 손을 잡고 목욕탕에 다녔다.   


할머니는 내게 짜증이나 화를 내는 법이 없으셨다. 그에 반해 나는 사춘기가 왔을 때 툭하면 짜증을 냈는데 그때도 내 곁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 있는 존재는 할머니였다. 할머니에게 치매라는 병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때 내가 할머니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서 화병이 걸리신 건 아닌지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휴학을 하고 전국 노래자랑이란 프로를, 또 트로트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노래 부르는 걸 평소에도 좋아하셨는데 치매가 걸리고 나서는 훨씬 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전국 노래자랑을 보시면서 끊임없이 박수를 치셨다. 나는 그때 할머니의 곁에 찰싹 붙어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거나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훨씬 더 신이 나셔서 팔을 더, 더 크게 저으시면서 박수를 치고 좋아하곤 하셨다. 할머니가 박수를 치면 혈액 순환이 좋아지고 건강도 좋아질 거라 믿었다. 나의 목표는 할머니가 더 많이 웃으시고 행복한 거였다.


또 한 가지. 나에게는 매일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할머니가 그동안 집에만 계셨을 생각을 하니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매일 밖으로 나가야 했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부축을 받아 보행기를 끌고 아파트를 돌았고, 컨디션이 떨어질 때는 휠체어를 타고 아파트를 돌았다. 휠체어에 옮기는 걸 돕거나 혼자서 해야 했다. 그때면 할머니의 한쪽 어깨의 무게가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는데 나는 그때 할머니가 풍선처럼 하늘로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던 때여서 오히려 그 무게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할머니가 지금도 내 곁에 계시고, 아직 살아계신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할머니를 옮기 때에는 나는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등을 내어 드렸다. 할머니와 나의 상황이 바뀐 것이다. 어렸을 적 매일 같이 할머니 등에 업혀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들곤 했던 내가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먹고 이렇게 자라 있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놀이터에 앉아 한참을 그곳에 핀 꽃과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고, 화단이 있는 곳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까서 먹기도 했다. 피곤한 날에도 나가는 걸 주저하지 않고 좋아하셨던 할머니는 그동안 얼마나 밖이 그리우셨을까. 나는 그동안 못 해 드린 걸 다 해드리고 싶었다.


할머니는 이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걸을 수 없을 만큼 몸이 쇠약해지셨다. 몸이 편찮으셔 약물의 도움도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에 가셔야 했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가시고 나서, 나는 할머니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남발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바다로 가서 바람을 쐬어드린다고도 하고, 단풍이 드는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봄이 오는 길목에서는 꽃구경을 가자고 할머니 마음에 꽃바람까지 잔뜩 불어넣었다. 운전을 하지 못할 때는 운전을 못 해서 못 간다고 미뤘고, 운전을 할 수 있을 때는 할머니의 불편한 거동과 기저귀를 갈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미뤘다. 그때마다 나는 다음이 있을 줄 알았고, 그다음을 기약했다. 실제로 다음은 있었지만 그게 반복되고 익숙해지다 보니 더 이상 다음이 없어져 버렸다. 소변 줄을 꼽고 초점이 흐린 눈으로 한 곳만 응시하던 할머니는 너무 많이 약해져 이제는 나와 함께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떠나고는 정말 다시는 함께 갈 수 없었다. 지키지 못한 무수한 약속들이 후회로 바뀌어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할머니가 편찮으신 후 할머니와 온전히 함께 보낸 날들이 떠오르며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갔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일상을 전혀 다른 자세로 대하게 되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 사랑하는 이의 아픔이나 상실로 깨어지는 순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너무 평온해서 자칫 무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자기 전 급박한 일을 겪지 않은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감사하게 생각했으며, 곁에 있는 가족들을 더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그 전보다 더 많이 표현하게 됐다. 오늘 하루의 특이점이 있어야만 얼굴을 마주 보고 할 얘기가 생긴다는 것도 아니란 걸 알았다.

하루 세끼 끼니를 챙겨 먹는 것처럼 수시로 관심을 가지고 상대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관심을 가진다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더 많이 생각하고, 쳐다보고, 얘기를 나누고 같은.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거뜬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얼마나 쉬웠냐면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그 질문 하나면 다 괜찮을 정도였다. 그 시절 할머니를 외롭게 만든 건 똑같은 생김새로 각기 다른 비밀번호를 가진 까다로운 현관문도,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도 아니었다. 내가 집에 온 걸 보고 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 표정이 할머니가 보낸 하루의 전부 일 거라고 방관해버린 내 모습이었다.


내가 낳은 아이들을 보며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은 인꽃(人花)이라고 말하며 행복해하는 엄마와, 엄마만큼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내가 가서 재잘재잘 얘기하는 걸 귀 기울여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아빠와의 시간이 신랑과 아이들과의 시간만큼 길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끝을 생각하면 때로는 마음이 사시나무 떨듯이 요동치고 눈물이 흐를 만큼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슬퍼하는 대신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는 걸 감사히 여기는 것. 또 사랑하는 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이 표현하는 것.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할머니가 가르쳐준 가장 값진 선물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할머니는 내게 떠나시는 그 순간까지도 약속 하나 못 지킨 나에게 아낌없는 나무처럼 선물만 잔뜩 주고 가셨다. 할머니가 주신 사랑의 뿌리는 내 마음속 깊이깊이 박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귀중한 양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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