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해봤다고 방학이 달다.
아메리카노가 달다고 느끼는 것처럼.
여덟 살 첫째의 두 번째 방학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한 달 전쯤부터 잠을 설쳤던 것 같다. 당장 둘째까지 방학을 하면 그 둘을 볼 사람이 필요한데 맡길 곳이 없었다. 끙끙 앓았던 것 같다. 잠을 설치기를 며칠 째, 결국 이야기를 해야 했고 그 일이 해결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결국 아이의 첫 번째 방학처럼 둘째가 방학을 하는 두 주간 아이들을 온전히 데리고 있을 수 있게 됐다. 이 일이 해결된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 모든 시름을 털은 것처럼 가벼워졌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면서도 계획을 미리 짜놓아야 마음이 놓이는지라 또 며칠 밤을 설치며 아이들과 어느 곳에 가고, 집에서는 또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생각했다. 나는 돈이 얼마가 들든 방학 때만큼은 거의 매일 두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다짐했다. 이번 방학을 꼭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방학은 아이의 독감과 함께 찾아왔다. 같이 모둠을 하는 친구 세 명이 독감에 걸려 차례로 학교를 나오지 못하던 차였다. 첫째의 독감을 시작으로 가족 모두 시간차를 두고 감기에 걸려 골골거렸다. 우리는 추운 날씨와 약해진 체력 때문에 집에 있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는 않았다. 창문에 붙이려고 산 뽁뽁이를 바닥에 깔아놓고 색색의 모래를 들어부어 한참을 가지고 놀았다. 세 살짜리 둘째 아이는 자그마한 몸집만큼 얼마나 가볍고 재빠르던지 자꾸만 돌아다니는 바람에 그 주위가 모래찌꺼기들로 가득했다. 결국 끝나갈 때쯤 애들은 모래 놀이를 하고, 나는 주변 모레를 주우러 다니는 놀이를 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건데도 셋 다 약을 먹는 처지라 기운이 빠지고 힘에 버거웠다. 그래도 노는 시간만큼은 깔깔거리며 참 신나게 놀았다.
방학 동안 자주 억울한 보드게임을 하기도 했다. 첫째 아이는 아직 자신이 지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를 들면 같은 모양의 과일이 다섯 개가 되면 종을 치는 할리갈리를 했는데 그건 종 치는 스피드가 생명인 게임이었다. 몇 번 내가 종을 먼저 쳐버리니 나만 이제부터 종을 칠 일이 있으면 1초 후에 종을 치라고 했다. 아이가 게임을 하고도 울거나 짜증 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하지만 결과가 뻔한 게임이 재밌을 리 없었다. 친구들과는 절대 이렇게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다.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게 게임인데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불공정한 게임을 하면서도 반복적으로 알려줘야 했다. 그래도 나라를 사고파는 호텔왕게임은 좀 상황이 나았다. 자신이 내 땅에 걸렸을 때 아예 발뺌을 하고 돈을 안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깎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가끔은 없던 일로 해달라고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는 내가 자신의 땅에 걸렸을 때도 깎아주고 기분이 좋으면 봐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 끝이 나질 않는다는 걸 이 아이는 알까. 가끔 닌텐도 게임을 하며 포켓몬을 잡기도 했는데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내가 먹지 않아도 두 아이들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렀다. 하지만 벌써부터 먹성이 좋아도 너무 좋은 두 아이를 키우느라 밥, 간식을 챙겨주다 보면 벌써 날이 저물었다. 정말 많이도 먹었다. 어린이집에서 괜히 제일 잘 먹는다고 말했을까. 둘째도 첫째처럼 살집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배만 볼록 나와서 내복을 입고 있으면 유독 그곳이 도드라졌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안 먹으면 애가 탈 텐데 잘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실은 이 둘의 존재자체가 고마웠다. 우리 집이 북적북적할 수 있는 것도, 늘 이야기와 웃음이 넘쳐날 수 있는 것도 이 에너자이저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둘에게는 결코 방전이란 스위치가 없었다. 잠들기 전 순간까지도.
그날도 내가 해준 김치볶음밥이 입맛에 맞았는지 첫째 복덩이가 찬사를 금치 않았다. 움푹한 접시에 두 그릇을 먹고도 남은 것까지 먹겠다고 가져갔다. 근데 단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첫째의 목소리였다. 첫째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잠시 책을 읽는 사이 동생이 물약을 김치볶음밥에 마구 흩뿌렸다는 것이다. 첫째는 동생을 따라다니며 화를 내고, 나는 그걸 수습하느라 쩔쩔매고 정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또 하루는 둘째의 새 장난감을 뜯었는데 약이 있어야 소리가 나는 거였다. 내가 하는 얘기를 들었는지 건전지를 찾으러 간 사이 둘째 아이는 새 장난감에 물약을 붓고 있었다. 그 약이 그 약인 줄 알았던 것이다. 물약으로만 친 사고만 이렇게 두 건이었다.
둘째는 귤을 보물처럼 늘 손에 쥐고 다녔다. 그런데 그게 첫째에게 먹잇감이 되었다. 심심하면 둘째 손에 쥔 귤을 빼앗아 달아났던 것이다. 그러면 또 둘째는 울음바다가 되어 형을 따라 뛰며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들을 보며 나는 속에서 용암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꼈다. 아예 그 장난감에 관심도 없다가도 동생이 만지고 있으면 원래는 자기 거였다고 빼앗아 가기도 하고, 짱구처럼 엉덩이를 내밀고 흔드는 걸 동생이 배우게 반복하기도 했다. 그리고 놀아달라는 요구는 끝이 없었다. 한 가지를 하며 놀아주면 어른인 우리가 보기에는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겨우 이것 놀아줘 놓고 놀아줬다고 하냐는 말투를 사용했다. 그렇게 쫓기듯이 최선을 다해 놀아줘도 돌아오는 게 짜증인 날은 나도 너무나 속이 상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아이가 바라는 기준이 다를 수는 있지만 내게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서글프기까지 했다. 그럴 때면 상처를 덜 받기 위해서라도 이 아이는 다 큰 어른이 아니라 아직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야 했다. 신랑은 주말에 아이와 하루를 함께 있으면서 어떻게 내게 하루종일 같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자신은 진짜 울화통이 터져 죽을 것 같다고 했다.
둘째는 자꾸 손에 짚이는 걸 던졌다. 그것도 그냥 바닥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약 올리듯 툭툭 던졌다. 그러니 첫째의 목이 성할 날이 없었다. 어느 형아가 동생이 귤껍질을 까서 톡톡 던지는데 가만히 있을까. 그러다 가끔 더 묵직하고 위험한 걸 던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둘째를 호되게 야단쳤다. 하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둘째를 보며 이 아이가 알아듣긴 알아듣는 건가, 괜히 내 목만 아프고 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늘 해맑게 사고를 치고 수습은 전혀 하지 않는 둘째 때문에 육아의 쓴맛을 톡톡히 봤다. 하지만 날 바라보는 그 미소와 안기며 짓는 그 애교 가득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요즘 유독 일관되게 존댓말로 말하는 게 있는데 그게 "싫어요."였다. 까마귀가 물고 가기 직전이라 얼굴 좀 닦자 해도 "싫어요.", 기저귀에 묵직한 걸 달고 다녀 좀 갈자해도 "싫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버려 놓아 갈아입자 해도 "싫어요." 싫은 게 아주 얼마나 많은지 저 말을 그렇게 자주 쓰면서 존대를 하니 더욱 약이 올랐다. 필사적으로 잡으러 가도 내가 미꾸라지를 낳아 놓았는지 잘도 도망을 갔다. 그때만큼은 아이같이 보이던 첫째가 내게 힘이 되어주었다. 첫째의 이름을 부르면 어디선가 쏜살같이 달려와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마칠 수 있게 도와주고 갔다. 진짜 어른 한 명 몫을 하는 첫째를 보며 얼마나 든든하고 듬직하던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뭐 별 거 먹은 것 같지는 않은데 설거지 거리는 또 얼마나 성실히 쌓이던지. 그 쌓이는 게 설거지 거리가 아닌 첫째가 내게 가지는 만족감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고 놀아주고 놀아줘도 끝이 없었다. 그렇게 고생하는 게 일상인데도 아이들의 "엄마 좋아"라는 소리가 내 고생을 덜어 냈다. 몸이 가뿐하고 정신 또한 맑아져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갔다. 포실포실한 엉덩이를 내게 딱 붙이고 앉아있는 아이는 그 자체가 힐링이었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따스하고 좋은 거구나 새삼 실감이 났다. 그럴 때면 나는 안긴 아이를 더 꼭 안아주었다. 다리가 저려도 자세가 불편해도 하나도 티도 나지 않았다. 그 보드라운 아이가 내 품에 안겨있다니. 안겨있는 건 아이들인데 내가 구름 속에 누워있는 것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둘이 재밌게 노는 모습은 또 어떤지. "깔깔" 웃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놀고, 뛰어다니면서 놀고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세상이 모두 무해했다. 이 세상은 너무나 밝고 그저 밝기만 한 곳이었다. 그것보다 마음을 뿌듯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도 귤 한 개로 서로의 인심을 잃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것도 둘이 함께 살고 자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모든 게 좋게 보였다.
그렇게 방학이 시작되기 무섭게 벌써 일주일이 흘러버렸다. 그동안 우리가 집을 벗어나 간 곳이라고는 병원뿐이었다. 신랑의 월차날 딱 한 번 바다에 다녀오긴 했는데 그것도 녹록지가 못했다.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추억을 쌓겠다고 망망대해 앞에 텐트를 쳤다가 바람에 날려가기 직전인 찌그러진 텐트 안에 앉아 있게 됐다. 바람에 날아가려는 곳마다 사람이 앉아 고정시켜가며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콧물의 피자를 먹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고운 모래라는 토핑이 더해지는데 정말 신세계였다. 그날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긴 찍었는데 차 안에서 찍은 거였다. 찍어놓고 보니 그곳이 바다인지 어디인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얼굴이 담겼다.
"그럼 됐지 뭐."
둘을 데리고 나가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건 내가 욕심이 과한 것일 것이다. 둘 다 용수철같이 위험한 데로 튀지 않고, 무탈하게 집으로 돌아온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나는 이번 방학에도 내가 해주고자 했던 것보다 해주지 못한 것들이 후회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젠 나도 알고 있다. 그걸 다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알차고 행복한 방학을 보낼 수 있다고 말이다. 돈을 비싸게 주고 이곳저곳 다니지 않아도 잊지 못할 따뜻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고. 우리는 앞으로도 자주 셋이 둘러싸여 모래놀이도 하고 레고 조립도 하고 보드 게임도 하고 팽이도 접을 것이다. 그러다가도 또 투닥투닥거리고, 누군가가 울고, 달래고 그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온종일 함께 보낼 수 있는 방학이 정말 소중할 것이다.
주말에는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가족탕을 예약해 놓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 아이들을 키우며 미리 하는 걱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미리 하는 계획 중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몇 개나 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일주일이 이렇게 후딱 지나간 것처럼 첫째를 데리고 출근을 하는 것도 아쉬울 만큼 금방 끝나버릴 것이다. 그럼 나는 또 '힘들었어도 그때가 좋았지.' 함께했던 시간을 회상할 것이다. 살면서 후회를 남기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아이와 함께하는 방학 동안의 하루하루를 지금보다 더 아끼고 사랑해야겠다. 아이들을 더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