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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Nov 26. 2024

그림의 역사 4

그림자와 속임수

그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어야 볼률감 즉 입체감이 드러난다. 실제 사물과 인간은 3차원의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대개의 그림은 이차원의 평면에 그려진다. 그나마 부조나 조각 혹은 건축물은 3차원적 입체감을 나타낼 수 있으나 과거의 화가나 사진사들은 이런 입체감을 위해 그림이나 사진 속에 그림자를 넣어 볼륨감을 드러내는 효과를 기대한다.


호크니는 작품을 감상할 때 그림자를 눈여겨본다고 한다. 자신이 자란 영국의 브래드포드(Bradford)에서는  좀처럼 그림자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전에 파리 현대 미술관에서 스페인의 조각가 홀리오 곤잘레스(Julio González)의 작품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고 말한다. 인공조명 때문에 이 조각들에게는 진한 그림자들이 생겨났고, 이 완벽한 평면 형태는 입체 조각과 상반되는 듯 보였다.

게이퍼드는 그림자가 네거티브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즉 그것은 빛의 원천을 가로막고 있는 불투명한 대상의 뒷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투영된 네거티브 이미지이며, 아웃라인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부분이다. 호크니는 그림자가 빛의 부재일 따름이며, 사진을 찍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고 찍으며, 선 하나를 드로잉 할 때도 그림자를 무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 예술이 등장하면서 그림자의 존재가 의미를 같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진을 찍으려면 조명이 필수적인데, 그것이 태양의 빛이든 인공조명이든 그림자가 나오게 된다. 그는 최초로 종이에 인쇄된 사진 중에 최고의 사진은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과 로버트 아담슨이 에든버러에서 제작한 작품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들의 작품 중 <목사의 방문>이란 사진을 대표적 예로 든다.    

게이퍼드는 야외사진에는 직사광선이 필수적이며, 흐린 날의 사진은 볼륨감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즉 그림자가 없으면 사진의 볼륨감이 떨어지기에,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아침 일찍 혹은 해질 무렵에 작업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왜냐하면 정오의 햇빛이 비치면 모든 것이 평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진가 리 플리들랜더는 그림자를 최대한 활용한 사진을 찍었는데, 1966년 뉴욕의 거리에서 한 여인의 뒷모습에 비춘 자신의 그림자를 마치 자신의 자화상처럼 활용했다. 이런 기법은 당시 새로운 장르의 영화 [말타의 매]에서 험브리 보가트의 스틸 사진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그림자는 영화 속 캐럭터보다 더 강력하고, 훨씬 더 사악하게 보인다.

호크니는 이태리의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가 할리우드 조명을 발명했다고 마치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는 극적으로 조명을 비추는 방법을 발명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홀로베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란 그림에는 이러한 조명 효과가 그 이후 영화 조명이 모방할 정도로 뛰어나다.

마찬가지로 다빈치의 그 유명한 <모나리자> 역시 혼합 그림자가 사용된 최초의 초상화로 본다. 저자들은 <모나리자>를 할리우드의 여배우 마들렌 디트리히의 사진과 비교한다.     

게이퍼드는 서구 미술 바깥에서는 그림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비서구권에서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인도 아잔타 동굴 벽화의 희미한 그림자 정도이고, 아마도 그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으로 인하여 고대 그리스 예술의 희미한 메아리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기원 후 1세기 로마의 폴리니우스의 글에 따르면 "회화는 그림자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문장이 있다.

호크니는 18-9세기 유럽에서 '실루엣'이란 형태의 초상화가 매우 저렴하고 인기가 많았다고 말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 명칭은 '모두에게 절약을' 강조했다는 프랑스 재무장관 에티엔느 드 실루엣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세기에 영국에서는 실루엣 초상화를 '셰이드(shade)' 혹은 '프로파일(Profile)'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모든 실루엣은 측면을 묘사했고, 그림자만 가지고 대상을 파악하는 인간의 인지력에 의존했다.


영화에서도 실루엣은 서사의 일부로 사용될 수 있다. 캐럴 리드의 기념비적 작품 <제3의 사나이>에서 영웅이자 악당인 해리라임이 비엔나 거리 저편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실루엣을 사용한 놀라운 영상 이미지를 보여준다. 라임 역할을 한 오손 웰스는 그날 촬영장에 없었고, 벽에 비친 그림자는 조감독 가이 해밀턴의 것이었다. 이처럼 그림자는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일루젼(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시 로마인 폴라니우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당시 헤라클레이아의 제욱시스는 최초의 진짜 스타 화가였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선정적 자연주의>에 유래한다. 그는 에페소스의 파르하시우스와 사실주의 대결을 벌였다고 한다.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왜냐하면 그가 그린 포도가 너무 실감이 난 나머지 새들이 그 주변에 모여들 정도였다고 한다. 마치 신라시대의 솔거란 화가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이 실물과 유사해 새들이 부딪혀 죽었다는 설화와 유사하다.


17세기의 스페인 정물화가 후안 페르난데스는 제욱시스와 경쟁하려는 듯 놀라운 자연적 사실주의 그림을 제작하였다. 평론가들의 공정한 평가에 따르면 페르난데스의 <네 포도송이가 있는 정물>이나 <매달린 포도 두 송이 정물>이란 그림은 극사실주의적 그림의 걸작으로서 제욱시스를 뛰어넘은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의 그림은 거의 모든 고대 작품을 능가한다.

고대 그리스의 사실적 예술 작품들도 당시의 대표적 철학자인 플라톤을 괴롭혔다. 플라톤이 볼 때 예술은 자연의 모방 혹은 재현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보는 변화하는 자연 자체 역시 이데아란 불변적 본질의 모사품이기에 <예술은 모방의 모방>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은 논리와 수학 그리고 기하학에 비해 대단히 저급한 수준의 지식이었다.


호크니는 고대의 철학과 일부 종교가 세계를 묘사한 픽처를 만드는 일에 왜 그렇게 반대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유대인과 무슬림과 같은 계시종교는 왜 이미지와 적대하는가? 그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인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우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라는 명령이 자신을 당혹스럽게 한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화가로서 그는 회화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이 계명이 나온 배경은 고대 근동의 다신교적 전통과 많은 자연신을 형상화한 사원과 예술품을 마치 신인 것처럼 경배하는 것에 대한 유일신 종교의 구별을 위한 것이다. 그 후 이 계명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성상 혹은 성화에 대한 인정과 불인정의 논쟁으로까지 연속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대부분의 개혁주의 기독교 역시 고중세의 로마 가톨릭처럼 사제나 목사들이 특별한 옷을 걸치고 설교하며, 교회 건축물을 신고딕식으로 짖거나 그 안에 십자가나 예수에 관한 도형들로 채우는 데 미술가나 건축가를 동원한다.   


현대 성서학자 중 어떤 학자는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를 <한 사람에 대한 네 편의 초상>으로 설명한다. 즉 보는 시각에 따라 4 복음서 역시 각기 다른 관점에서 예수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만약 성서 이외에 예수에 대한 명확한 서술이 없다면, 성서 역시 문자라는 상징적 기호의 연결고리에 불가하다. 과연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우리는 그 글들을 넘어서 볼 수 있을까?  

이제 이 장의 결론으로 가보자. 플라톤의 책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 바로 <동굴의 비유>이다. 그 비유에서 그는 동굴 안의 죄수들이 투영된 벽의 그림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일반 대중들의 지식은 마치 동굴 안에서 죄수들이 횃불에 비친 자신들의 그림자를 보는 인식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호크니가 보기에 인간은 분명히 자연의 시각적 투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왔고, 오늘날까지도 그것에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텔레비전의 픽처 역시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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