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예정설, 환생의 교리
힌두이즘은 원인과 결과의 교리를 믿는다. 그것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바다'라고 한다. 카르마(karma)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행위의 결과를 의미하기도 한다. 행위의 결과나 결실을 '카르마팔라'라고 한다. 행위자에게 되돌아온 카르마적 힘은 그의 몸과 마음에 작용하고 난 후 소멸된다. 그것은 행위자를 떠나 우주적 에너지의 광대한 창고의 일부가 된다.
어떤 행위들은 그 고유한 본성 때문에 결과를 늦게 산출한다. 그것은 마치 만기일이 늦은 정기 예금과 같다. 그래서 어떤 결실은 행위자의 미래 생애에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힌두이즘에서 카르마의 교리는 또한 환생의 교리와 연관되어 있다. 행위자가 지난 생에서 행한 행동의 결과가 모여 카르마의 힘이 된다. 이러한 힘은 '산치타 카르마' 혹은 '축적된 카르마의 힘'이라 한다. 그때 어떤 하나가 만기가 되면 그것은 활성화된 형태의 카르마의 힘을 '프라라브다 카르마'라 한다. 이 카르마가 인간 출생의 원인이 되고 그 수명을 결정한다.
이 생애에서 행한 모든 행위, 혹은 그 결과는 '크리야마나 카르마' 혹은 '아가미 카르미'라고 불린다. 힌두 경전에서는 어떤 종류의 크리야마나 카르마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려준다. 신성한 영혼이나 여인을 죽이는 것과 같이 극히 흉악한 범죄를 저지는 사람은 이 생애에서 그의 나쁜 행위로 인해 바로 고통받는다. 그 밖에 상대적으로 사소한 다른 좋은 혹은 나쁜 행위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살의 경우는 어떨까? 자살은 큰 실수이다. 왜냐하면 카르마의 힘은 죽음과 함께 멈추지 않는다.
환생의 관점에서 힌두이즘은 갓 태어난 아이가 '순수한 영혼' 혹은 '죄 없는 영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탄생은 인생의 달고 쓴 경험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고 발달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 죽는 것은 그러한 기회를 잃는 기회이다. 지구상의 짧은 생은 그로 하여금 어떤 영적 발전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다음 질문은 깨달은 자로 불리는 성인도 육체적 질병이나 정신적 괴로움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사람들은 성인은 완벽하니까 다른 사람처럼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수많은 진정한 성인이 그들의 생애에서 많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성인은 과거를 갖고 죄인은 미래를 갖는다"는 말은 왜 성인이 이생에서 고통받는지를 설명해 준다.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여전히 자신의 카르마의 힘이 소진될 때까지 프라바브 카르마를 풀어야 한다. 카르마의 교리에 따르면 모든 산치타 카르마 혹은 축적된 카르마는 궁극적인 영적 체험을 함으로써 성인이 되었을 때 문자 그대로 재처럼 타버린다. 카르마의 교리에 예외가 있다. '신성한 화신'은 결코 카르마의 힘에 의해 통제받거나 프라라브다 카르마에 의해 육체가 생기지 않는다.
카르마의 힘이 인간의 생애를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카르마의 힘은 인간의 생을 지배하는 많은 힘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인간은 카르마에 지배를 벗어나는 행위의 자유 또한 지니고 있다. <바가바드기타>에서는 프라라브다 카르마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카르마의 힘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마음을 정화시시키고 이를 통해 신의 비전을 갖도록 해준다. 신의 비전 이후에 모든 산치타, 혹은 축적된 카르마는 없어진다. 이에 따라 탄생과 죽음의 반복적인 순환에서 해방된다.
그렇다면 힌두이즘에서 신의 은총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우선 신의 은총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조건적인 은총은 진정한 은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고 공평하며 무조건적이어야 한다. 태양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모두 골고루 비추듯이, 신은 자신의 은총을 선하거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보여준다. 슈리 마라크리슈타는 이것을 다음의 비유로 설명한다. 작은 방에서 촛불이 타고 있다. 촛불의 빛으로 어떤 사람은 경전을 읽고 어떤 사람은 같은 방에서 달러를 위조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촛불은 신의 은총을 상징한다.
결국 힌두이즘도 고대 중국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사상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기독교에서도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온 은총과 자유의지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결론이기도 한다. 내가 이 생애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것'뿐이다. 심지어 그가 아라한이나 부처 혹은 소크라테스나 예수라 하더라도 여기에 그 누가 해당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