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는 발레리의 책에서 아주 인상적인 구절들을 집어낸다. 그것은 바로 유럽인 햄릿이 지식인 햄릿으로 변모하여 근대 유럽의 대표적 지성인의 두개골을 움켜잡고 그다음에 이어서 다른 두개골들을 발굴하면서 근대정신의 혈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다. 발레리는 말라르메의 제자이다. 그리고 말라르메는 보들레르의 상징주의 시학을 이어받아 프랑스의 상징주의 사조의 중심에 있었다. 발레리 역시 [해변의 묘지]라는 시에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절정을 보여준다.
우선 우리는 잠시 우회하여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특성을 세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알아보자. 데리다는 문자로 체계화된 철학적인 지식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전통인 철학적 문자와 신학적 말씀을 넘어선 글쓰기가 가능한 이유가 바로 상징주의적 표현이 정신과 사물의 이원론을 해체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데리다의 글을 상징주의 시학을 전공한 문학비평가가 읽으면 더 쉽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나오는 대표적 구절을 먼저 살펴보자. "La Nature est un temple où de vivants piliers. Laissent parfois sortir de confuses paroles: 자연은 살아 있는 기둥들이 서 있는 하나의 사원, 그 기둥들 사이로 모호한 말들이 새어 나온다." 보들레르는 자연을 상징의 숲으로 보고 그 안의 사물들이 직접 말하지 않을 뿐 침묵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물의 말을 담아내는 인간의 언어가 바로 시적 상징들이다. 말라르메는 그의 시론에서 "Nommer un objet, c’est supprimer les trois quarts de la jouissance du poème: 사물을 이름 붙이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Brise marine: 바다의 산들바람]이란 시에서 "La chair est triste, hélas! et j’ai lu tous les livres: 육신은 슬프도다, 아아! 나는 이미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라며 오히려 언어적 상징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제 발레리란 종착역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대표 시 [Le Cimetière marin: 해변의 묘지]에서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 바람이 분다! 살아보려 시도해야 한다!"라고 하며, 여기서 이제 시적 상징은 더 이상 자연의 신비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정신의 결단과 각성이 된다. 그의 시론은 "Un poème n’est jamais achevé, seulement abandonné: 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포기될 뿐이다."하고 말한다. 즉 발레리에게 모든 상징은 닫히지 않으며 의미는 항상 잠정적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데리다의 <의미는 항상 차연(différance) 속에 있다>는 명제와 연결된다.
다시 데리다가 집어낸 [정신의 위기] 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 "엘시노어의 거대한 테라스 위로 이제 유럽인 햄릿이 수천의 유령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지식인 햄릿이다. 그는 진리들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성찰한다.... 그가 두개골 하나를 움켜잡는다면, 이 두개골은 저명한 두개골이다. 누구의 두개골인가? 그것은 레오나르도의 두개골이었다....그리고 이 두개골은 보편적인 평화를 꿈꾸었던 라이프니츠의 두개골이다. 그리고 이 두개골은 칸트로서 그는 헤겔을 낳았고, 헤겔은 마르크스를 낳았고... 를 낳았고... 햄릿은 이 모든 두개골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것들을 버린다면!.. 그가 자기 자신이기를 그치게 될까?"
발레리가 의도하는 것은 분명하다. 유럽의 지성사적 유산을 제거한다면 그것에 근거한 유럽 지식인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발레리나 데리다는 근대적 이성을 거슬러서 희랍적 정신과 물질, 언어와 사물의 이원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데리다보다 앞서 데리다적으로 이미 사유했다. 그러므로 상징주의와 해체주의의 연속성은 다음과 같다. 암시에서 차연으로, 여백에서 흔적으로, 리듬에서 반복으로, 의미의 다의성에서 의미의 비결정성으로, 사물의 부재에서 현전의 비판으로 나아간다.
데리다는 발레리가 두개골 및 정신들의 세대(계보)에 대하여 말한 것, 그리고 말하기를 잊어버린 것에 대하여 그의 의도가 우리에게 적어도 세 가지 것(trois choses)을 환기시키기 위함으로 이해한다. 이 세 가지 것은 정신과 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정신이라 일컫는 사물(chose)과 관련된다. 여기서 우리는 상징주의자나 데리다가 결코 유물론적 의미에서 정신을 사물로 부르는 것이 아님을 먼저 주지하자. 그리고 데리다가 하는 다음의 말을 음미해 보자. "우리가 정신과 유령을 구별하지 않게 되자마자, 정신은 유령 안에 정신/혼령으로서 몸을 갖고 구현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 자신이 엄밀하게 지적하듯이 유령은 역설적인 합체, 신체화이며, 정신의 어떤 현상적이고 육체적인 형태이다. 유령은 이름 붙이기 어려운--영혼도 신체도 아니고, 영혼이자 신체이기 때문에--어떤 '사물'이 된다."
이 문장들에서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점만은 확실하게 볼 수 있다. 그가 의도하는 사유는 우선 플라톤 전통의 사유인 주객분리적 사유도 관렴론과 유물론을 분리하는 사유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쪽에도 근거나 기원 그리고 본질과 보편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게 나타나는 독특한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사물로 번역된 chose의 어원은 라틴어 causa(원인, 이유, 사건, 소송)에서 비롯되었다. 후기 라틴어에서 causa는 cosa(소송의 대상, 논의되는 사안, 문제가 되는 것)의 의미로 확장되며 여기서 프랑스어 chose(사물)는 이미 말에 걸린 것을 의미한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chose의 일반 의미는 사물, 어떤 것이나 현대 철학과 문학에서는 정확히 명명되지 않은 대상, 개념화 이전의 잔여, 말하려 하나 말해지지 않는 것의 의미로 사용된다. 데리다는 바로 이런 의미의 차연에서 유령의 개념과 연관시킨다.
우리는 유령을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는 다른 것이지만 가끔씩 사물이나 몸의 형체를 가지고 출몰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름이나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다가가면 흩어지고 없어지는 그런 것이어서 어떤 대상으로 고정화할 수도 없고 또한 없다고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데리다가 의도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 세계 속에도 여전히 그 유령들이 출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나중에 마르크스의 [자본]에 나오는 교환가치에 대하여 해석할 때도 [자본]은 바로 이러한 비감각적인 감각성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 1장에서 <교환가치는 비감각적 감각성(sinnlich übersinnlich, sinnlich-übersinnlich)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이런 말을 쓰는 이유는 이 개념이 단순한 수사나 역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형이상학, 인식론, 정치경제학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함이다. [자본]의 1장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분한다. 여기서 사용가치(Gebrauchswert)는 감각적, 물질적, 구체적 (쓸모, 질감, 무게, 효용)을 의미하고, 교환가치(Tauschwert)는 양적 비율, 추상적, 사회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는 교환가치를 eine sinnlich übersinnliche Sache(감각적이면서 동시에 비감각적인 것)로 표현하는 것이다.
비감각적 감각성이란 표현은 의미의 세 층위를 가진다. 우선 감각적이다(sinnlich)이란 상품은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이동하며, 화폐를 통해 가격과 숫자는 표시되고 인쇄되기에 교환가치는 현실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동시에 비감각적(übersinnlich)이기도 하다. 실제로 교환가치는 어디에도 감각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품 안에도 교환가치라는 성분이 들어 있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에 교환가치는 자연적 속성이 아니다. 따라서 ‘감각적-비감각적’이란 의미는 감각적 사물 속에 비감각적 사회관계가 응결되고 동시에 물질이 사회적 추상을 몸에 지닌 상태이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비판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인 물신(Fetischcharakter)의 핵심 구조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물신성(Fetischcharakter der Ware) 은 사회적 관계가 사물의 성질처럼 나타나는 구조를 가리킨다. 따라서 가장 구체적인 예는 면 티셔츠에 제조원가나 노동조건은 보이지 않고 49,000원이란 가격표만 보이는 현상이다. 소비자들이 이 티셔츠는 49,000원짜리로 인식하는 순간 노동시간, 노동 강도, 공급망 권력, 임금 착취, 유통 구조와 같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가격’이라는 사물의 속성처럼 응결된다. 그러므로 가격이 관계가 아니라 물건의 성질로 보이는 순간, 인간은 물신성의 구조로 들어간다. 물신성의 결정판은 바로 화폐이다.
화폐는 단지 지폐 한 장으로 종이일 뿐인데 사회적으로는 돈은 힘이 있다, 돈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실제로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 국가 권력, 법과 제도, 역사적 축적이 작동하지만, 힘이 종이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마르크스는 화폐가 인간의 사회적 능력이 사물로 이전된 형태를 물신성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사전 이해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란 주제에 대한 데리다의 본격적 담론을 다음 에세이에서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