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들 해석 5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

by 박종규

앞에서 언급한 이 책의 초안이 된 강연에서 데리다는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 Whither marxism?>를 당시 컬로퀴엄이 제기하는 질문으로 정의한다. 그런 다음 "어떤 점에서 이 질문이 햄릿과 덴마크 그리고 영국을 가리키는가? 왜 이 질문은 우리에게 어떤 환영을 뒤쫓으라고 속삭이는가? 어디로? 환영을 뒤쫓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환영에 의해 항상 추적당하는 것으로 귀착된다면, 우리가 그것을 쫓는 사냥 그 자체에 의해 아마도 우리가 뒤쫓기는 것으로 귀착된다면? 여기에서 다시 한번, 우리 앞에, 장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미리 되돌아온다"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첫 번째 질문에 연속된 질문들은 그 의미에 있어서 데리다 특유의 차연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시적인 함축과 같이 단순하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마치 햄릿에게 나타난 혼령처럼 그에게 나타나 그의 미래를 암시하고 동시에 그 이후 햄릿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결국 과거에서 출발하여 미래에서 미리 현재로 돌아온다. 이런 철학적 설명보다 차라리 햄릿 1막 5장의 마지막 대사를 다시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오, 하늘과 땅의 신들이여! 그리고 지옥도 불러낼까? 오, 심장이여 견디어라. 내 몸의 근육들이여. 갑자기 늙지 말고 나를 든든히 설 수 있게 하라. 잊지 말라고? 그러마 불쌍한 유령이여... 내 기억의 여백에서 하찮은 기억들이랑 지워버리고자. 격언이며 지식, 과거의 인상들은 지워버리고 오로지 그대의 명령만을 기억의 갈피에 남겨두리라."

햄릿이 유령으로부터 떠맡게 된 복수의 명령은 마치 윤리적 책임처럼 햄릿의 기억에 남아 연극 전체의 방향을 결정한다. 데리다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간략히 책임의 윤리에 대한 칸트 이후 근대 철학과 현대 철학의 레비나스 그리고 데리다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살펴보자. 칸트 이후 유럽철학의 책임 윤리의 주체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자율적 주체의 의무로 여겨졌다. 그리고 책임은 행위 이후의 결과에 귀속되며 이런 윤리가 근대적 규범과 법의 보편적 원칙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현대의 책임 윤리는 급격하게 변모한다.

예를 들어 레비나스와 같은 현대 철학자는 <책임은 선택 이전에 이미 있기에 책임은 선행한다>라고 말한다. 즉 공동체 속에서 나는 이미 타자에게 빚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한 것 이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책임은 계산이 불가능하며, 근대의 사회계약론적 윤리를 넘어선 현대 철학이 지적하는 윤리와 책임의 부채적 구조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이런 담론을 이어받아 데리다의 부채(dette) 이론이 시작된다. 그는 레비나스의 책임 개념을 해체적으로 급진화한다. 데리다 역시 부채는 경제적, 도덕적 계산을 거부한다. 그는 부채는 기원 이전의 기원이며, 갚는 순간 이미 왜곡되기에 완전한 상환은 불가능하다고 [증여의 시간, Donner le temps]에서 말한다.

이제 부채는 개인 윤리에서 역사 정치의 층위로 이동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우리는 죽은 자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 말은 곧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는 일종의 역사적 부채를 자고 았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리고 정의는 현재에 완결되지 않기에 마르크스의 유령(specter)은 미지불 부채의 흔적으로 우리를 다시 호출한다는 것이다. 데리다의 ‘역사적 부채’를 현대 자본주의 일반에 적용될 때 드러나는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 금융화: 미래를 담보로 한 현재의 번영 구조. 이것은 미래의 노동과 자연을 현재로 이끌어오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 대한 비동시적 부채를 전가한다. 구체적인 사례는 국가 부태의 세대 전가와 연금 고갈 문제 등이고 채권자는 현재에 있고, 채무자는 미래에 있기에 이것은 유령적 채무 관계를 나타낸다. 2) 생태 위기: 회계에 잡히지 않는 부채, 개발 대상인 자연은 외부효과로 처리되고 말할 수 없는 채권자이지만 청구할 언어가 없기에 결국 어떤 생태적 복수(이상 기후 등)를 인류에게 돌려준다.


3) 미국 자본주의의 달러 패권주의: 세계에 대한 구조적 부채의 전가. 표면적으로 보면 달러는 ‘안정의 기축통화’이나 실제로는 미국의 부채를 세계가 함께 떠않는 구조로 전가된다. 데리다는 달러를 신뢰의 상징이자 동시에 연기된 상환의 기호라고 부른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미국의 관세 정책 역시 미국 자국을 위한 경제적 조정 장치로 보이나 이면에는 부채의 외부화 시도가 내재하고 있다. 만약 데리다가 살아있다면 그는 <아메리카퍼스트>란 추상적 구호는 미국이 만든 구조적 문제를 타국의 책임으로 돌리는 제스처에 불가하다고 말할 것이다.

다시 책 안으로 들어가자. 햄릿의 아버지 유령이 떠나간 이후 덴마크 왕실의 고관인 마셀러스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읊조린다. MARCELLUS: Something is rotten in the state of Denmark(덴마크에는 뭔가 썩어있어).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데리다는 이제 본격적으로 <유령론>을 전개한다.


“환영이란 무엇인가? 유령 곧 허상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고 잠재적이며 비실제적인 것에 불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의 현실성 내지 현존이란 어떤 것인가? 거기에, 사물 자체와 그것의 허상 사이에는 어떤 대립이 존재하는가? 반복과 최초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반복과 최후의 순간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모든 최초의 순간의 독특성은 또한 최초의 순간을 최후의 순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다른 것/ 모든 다른 것. 역사의 한 종언의 무대를 마련하기, 이것을 유령론(hantologie)이라고 부르자."

역시 데리다의 글은 난해하다. 그러나 계속 읽다 보면 헤겔의 변증법적 글쓰기와 사유에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는 것처럼 어떤 개념이나 논리로 고정화되기를 거부하면서도 거부의 패턴이 출현하는 것은 마치 한 시인의 시적 표현들 속에 그 시인의 시론(시에 관한 고유한 관점)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런 현상을 뇌과학자는 신경세포 사이에 존재하는 정보 알고리즘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생명이 탄생한 이후 수 십억 년을 거쳐 지금의 정교한 메커니즘을 가진 과정을 향후 수십 년 동안에 AI가 넘어선다는 것은 물리화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기술은 사유하지 못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은 스스로 학습하고 추론하는 AI 로봇이 등장해도 뇌의 한 기능만을 극대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록 건설현장의 포클레인은 손의 형상을 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손만큼 느끼지도 반응하지도 못한다 더구나 근원적 사유와 통합되지도 못한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