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들 해석 7

1950년대의 종말론적 주제들

by 박종규

1993년대에 데리다의 강연으로 시작한 <마르크스주의는 어디로>란 주제는 사실 1950년대 초반에 제기된 종말론적 주제들의 하나를 다시 호출한 것에 불가하다. 이 주제를 접한 순간 데리다는 곤혹감을 느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이미 1950년대 초반에 제기되었던 여러 종말론적 주제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말, 마르크스주의의 종말, 철학의 종말, 인간의 종말/목적들, 최후의 인간 등과 같은 물음이 등장하였고 데리다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들은 1950년대 지식인들의 일상 양식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얼마나 견실한 것이었는가/푸짐한 양식이었는가? 맛은 어떠했는가? 이는 한편으로 우리가 종말의 고전가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독해 내지 분석이었다. 그들은 근대의 종말론의 경전을 이루고 있다.(대문자 역사의 종말, 대문자 인간의 종말, 대문자 철학의 종말,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및 코제브에 의한 그들의 [종말에 대한] 유언 변경, 이는 한편으로 그리고 전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동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있었던 전체주의적 테러, 소비에트 관료체가 낳은 모든 사회경제적 재난, 과거의 스탈린주의 및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신스탈린주의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 해체라고 불리는 것이 전개되어 나온 요소이며, 이러한 복합적인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전개된 해체라 불리는 것에 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데리다는 햄릿의 대사를 통해서 20세기 초반과 20세기 후반에 이런 종말론적 주제들이 이어지는 시간의 틈새를 사유하고 다시 해석한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 The time is out of jont." 시간이 탈구되고 빠지고 벗어나고 탈궤되어있고, 시간이 탈이 나고, 쫓기다가 탈이 나고 뒤틀리고, 고장이 난 동시에 미쳐있다. 햄릿은 이 대사를 통해서 시간의 틈새들 중 하나를 뚫어 놓았다. 데리다는 우선 이 영어 대사에 대한 다양한 번역들을 통해서 이 번역들이 그것들을 변형시키는 간극 속에 있는 부정확한/부당한 것으로 모두 어그러져 있다고 본다. 그는 가장 비극적인 것은 탁월한 번역이 오히려 다른 언어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을 강화하거나 봉인해 버린다는 점을 지적한다. 도대체 그가 말하자고 하는 말은 무엇인가?


그가 제시한 몇 가지 흥미로운 프랑스어 번역을 살펴보자. 1. "시간이 경첩에서 빠져 있다." 경첩이란 비유는 영어 단어의 지배적인 용법 및 용법의 다양성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2. "시간이 불순하다." 상당히 위험한 번역이지만 시간을 날씨의 측면에서 생각하게 한다. 3. "세계가 뒤죽박죽이다." 뒤죽박죽이라는 말은 원문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4. "이 시대는 수치스러운 시대이다." 이 번역은 영어 원어의 도덕적 타락이나 도시의 퇴락, 습속의 문란이나 도착을 나타내는 관용적 의미와 일치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햄릿 자신이 이러한 뒤틀린 시간의 이음매에 의한 자신의 운명 즉 어긋난 시간의 이음매를 다시 맞추도록 운명지은 운명을 저주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서 햄릿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한다. "햄릿은 '이음매가 어긋나'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사명, 곧 징벌하고 복수하고, 응보라는 형태로 정의와 법을 실행해야 하는 사명을 저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사명에서 저주하는 것은 이런 속죄 자체에 대한 속죄이다." 데리다는 햄릿의 이런 서사를 법과 그 법의 집행에 대한 책무를 부여받은, 원초적으로 뒤에 따라오는, 따라서 상속받을 운명을 짊어진 세대에서만 도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 법 그 자체를 저주하듯이 햄릿에 나오는 유령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하나 이상의/ 더 이상 하나 아닌 유령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결코 상속받을 수 없다는 시대성을 강조한다. 즉 모든 시대정신(Zeitgeist)은 그 이전 시대정신의 유령을 감수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탄생한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계에서 태어난 동시대적 정신들은 이 운명을 어떻게 감내하고 극복하려 했을까? 데리다의 물음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햄릿이--니체 이전에, 하이데거 이전에, 벤야민 이전에--불평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만약 법이 복수에서 유래한다면, 언젠가는, 더 이상 역사에 속하지 않는, 유사 메시아적인 어느 날엔가는, 마침내 복수의 숙명에서 벗어날 정의를 염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문장 속에서는 현대의 시대정신들의 숙명 그리고 법과 정의의 실현 가능성과 그 근거에 대한 새로운 반성과 메시아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주제들이 복합적으로 얶혀있다. 동시에 그는 이런 연쇄를 프로이트적인 억압과 해방의 방식으로 사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나 그 이후 임상 심리학자들과 달리 데리다는 결정론적 정신분석학에 내재한 임상 결과의 수량적이고 인과적 계산에 의한 추론을 거부한다.

그는 오히려 같은 유대인 출신이지만 프로이트를 끌어들이지 않고 (유대인에게는 상당히 거리끼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받아들인 레비나스의 견해를 더욱더 급진적으로 밀어붙인다. "사실 억압적인 경제의 너머가 존재하는 데, 이는 <계산 가능한 평등>, 따라서 주체들이나 대상들을 동시에 대상화하는 회계나 귀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 단지 제제하고 복원하고 법을 실행하는 것에 자신을 관철하는 어떤 정의 구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물의 계산 불가능성으로서 정의>, 타자에 대한 비-경제적 탈-정립의 독특성을 위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라고 쓴다." 이 말의 핵심은 50년대에 제기된 서구의 종말론적 사유는 대체로 계량적인 경제학(모든 것을 수학적 통계 수치로 환원하는 경제학)과 결정론적 심리학(임상 실험의 데이터를 수치화하여 심리적 억압의 요소들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상담심리나 약물치료에 의존하는 심리학)으로서는 극복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현실 속에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근대법에 기초한 타인에게 끼친 피해만큼 형량을 결정하는 법적 실행도, 수세기 동안 종교적으로 관행화된 타인에 대한 용서와 자비 역시 일종의 계산가능한 은총이나 선물이 되었다는 비극을 폭로하고 있다. 과연 고의든 아니면 미필적 고의든 그것으로 인한 타인에 대한 살인이나 폭력이나 심신적 피해를 사형이나 무기형 또는 일정한 형량으로 대체하는 법적 계산법의 근거는 무엇인가? 영화 [밀양]에서 이창동 감독이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그를 대신하여 이미 신이 아니면 구세주가 용서했다고 편하게 웃는 살인자 앞에서 도대체 우리는 이런 종류의 평안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아마 '나치의 만행마저 원수를 사랑하듯이 용서하자는 기독교 사제들의 언사'나 용서하되 '절대로 잊지 말자고 맹세하면서도 끝까지 나치의 잔당을 추적하여 처벌하는 유대교인들의 행위' 사이의 괴리와 더 나아가 '푸틴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언어적 분열'은 정말 햄릿의 대사에 나오는 <시간의 뒤틀린 이음새>란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데리다가 정의(디케)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다시 해체하는 지루한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자. 여기까지 읽는 것도 철학에 비전공인 독자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다음 에세이는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단편적 글 모음인 [마르크스의 세 가지 말]에 대한 데리다의 구체적 해석을 따라가 보자. 우선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블랑쇼가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한 말은 1) 비판의 말(la parole critique) 2) 예언의 말(la parole prophétique) 3) 중단의 말/명령의 말 (la parole d’interruption/d’injonction)이다. 데리다는 이 말을 유령론적 언어로 해체적으로 재건한다. 비판을 유령처럼 돌아오는 부채로, 예언을 현대 세계에 도래할 심판으로, 중단을 정의의 무한한 지연으로 해석한다. 이 정도만 이해하고 마치기로 하자.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에게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