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는 블랑쇼의 글에서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 자체를 함께 유지하는 것을 사고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다시 그의 난해한 글쓰기가 시작된다.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을 함께 지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이, 이-접, 분산 내지 차이를 손상하지 않고서 그 자체를 함께 유지하는 곳에 우리 스스로를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장래에 도달하는 것이며,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이 개념 없이, 규정의 확실성 없이, 지식 없이, 연접이나 이접의 총합적인 접합 없이 또는 그 이전에 독특한 연결하기에 도달하는 그곳에 위치한 이러한 우리에 우리 스스로 도달하는 것이다. 연접 없이, 조직 없이, 당 없이, 국가 없이, 소유/고유성 없이 다시 만나기의 동맹(우리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고 이름 붙이게 될 '공산주의' 바로 이것이다."
데리다가 요청하는 공산주의는 외견상으로는 고전적인 프랑스의 몽상적 공산주의자의 사상과도 유사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란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면 비록 이것이 제도적, 정치적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하나의 세계 조직으로 연결되는 것을 데리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거부하기에 단지 윤리적 요청으로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런 요청의 지속 가능성과 사유와 실천을 끊임없이 교란하는 마르크스 철학의 힘을 현대 지성에 다시 부여하려는 데리다의 노력은 그의 유령론을 허상론으로 오해할 정도로 아방가르드적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64년 조직했던 제1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과 달리 주체가 노동자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유령들(죽은 자, 배제된 자, 아직 오지 않은 자)로 바뀌며, 실현될 수 없다는 이유로만 포기할 수 없는 것이며, 성공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동시대인에게도 책임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데리다는 마르크스를 폐기하지 않고, <혁명 이후에도 남아 있는 부채>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블랑쇼는 이미 과학의 이름으로 또는 과학으로서 이론의 이름으로 자주 마르크스의 좋은 텍스트를 통합하거나 정화하려고 시도했던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데리다는 블랑쇼의 글을 인용하면서 알튀세르와 그의 그룹들이 의도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화>란 목표를 해체하고자 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기본 원칙 즉 이론은 단지 올바른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과학 장치이며 핵심은 혁명을 위한 실천에 있다는 사상을 충실하게 계승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모든 이론은(그것이 일종의 과학이라 하더라도) 균열을 남기며, 실천을 보증하지 않으며, 이론은 스스로를 의심하게 하는 경계를 작동시킨다고 말한다. 사실 철학적 사고 자체는 메타-이론적 영역에 속한다. 철학의 본질은 형이상학(meta-physic)적이다. 비록 50년대의 종말론적 주제 중 하나 역시 형이상학의 종말이었지만 그것은 과학을 학문의 기준으로 볼 때 형이상학의 영역이 제거된다고 본 것이지 철학의 사유의 중심에 늘 형이상학적 사유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만약 독자 중에 영미권의 철학 도서를 읽어본 사람이면 그들의 글을 형이하학적 사례들 즉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여러 사례들을 열거하고 거기에서 주제로 이끌어가는 대중적 글쓰기나 말하기가 유럽 대륙의 철학자의 글 보다 훨씬 쉽고 논술이나 논쟁의 기술을 길들이는데 아주 실용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들의 글이나 강연은 대부분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추론 방식을 훈련시키고 과학의 결과를 접속하여 대중들에게 만족할만한 지적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독창성 부분에서는 특별히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 초반에 비록 몇몇 거론되는 철학자들이 있지만 프랑스의 지적 환경에서 만들어진 이 이단적이고 도발적이며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상가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유럽이란 구대륙에서 수입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프랑스의 철학 혹은 구조주의 정도라고 말하며 유럽의 문명이 더 이상 세계사의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자-정보 산업에서 유럽의 낙후는 유럽 자체의 방위력을 미국에 의존할 정도로 심각하다. 유럽은 점점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서 일종의 관광코스 혹은 영화나 화보를 찍기 좋은 배경 화면으로 전락했다는 자조도 들려온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의 후손답게 프랑스의 지성들은 다시 글로벌 자본주의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비판을 소환하든지 아니면 라깡의 뒤집힌 사유를 통해서든지 혹은 신이나 초월적인 세계의 관여 없이 윤리가 가능하다고 본 유일한 근대의 사상가 스피노자를 호출하기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푸코가 그랬고 들뢰즈도 네그리도 모두 스피노자를 호출한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 출신이면서도 동일하게 이단적 사고를 하는 데리다는 왜 스피노자를 호출하지 않을까? 이 질문을 우리를 다시 철학사의 미로로 빠지게 하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AI에게 물어보기를 바란다. 형이상학적 사유의 길은 마치 지도나 구글 어스 어플 없이 베니스 역 입구에서 무라노 섬까지 가는 것만큼 어렵다.
다시 데리다가 이 책의 제목을 구상할 당시에는 현대 철학계의 주된 주제 즉 지배하는 것 자체를 조작하는 신들림(Possession: 사유 주체가 스스로 사유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어떤 익명적 권력, 구조, 담론, 알고리즘에 ‘점유’되어 있는 상태의 은유적 표현)의 모든 형태를 염두에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세계의 무질서가 자신의 신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를 정착시키려고 시도하는 순간에 어떠한 부인도 마르크스의 모든 환영들을 물리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헤게모니는 항상 억압을 조직하고 따라서 신들림을 확증한다. 신들림은 모든 헤게모니의 구조에 속해 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현대 철학의 신들림에 관한 물음을 헤게모니와 관계보다는 근대적 주체와의 관계로 먼저 환원해 살펴보는 것이 독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신들림이란 말 자체는 나란 존재가 더 이상 나의 주체적 의지나 판단의 중심이 아닌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지속적 설교를 통한 신앙의 주입, 특정 이데올로기의 세뇌, 미디어 권력의 정보 조작, 상업 광고의 무의식적 구매 충동 등 현대 사회에서는 주체란 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인간의 의식은 이미 어떤 헤게모니에 의해 점유되어 있다. 아마 여러분들은 개인적 대화나 어떤 집단 속에서의 대화도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가 제시한 <이상적인 대화 조건(Ideale Sprechsituation: 강제, 왜곡,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조건에서, 오직 더 나은 논증만이 설득력을 갖는 의사소통 상황)>의 불가능성을 경험했을 것이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일반화된 주체 이론은 나라는 자아가 몸이란 자동차에 탄 운전사란 비유이다. 몸의 방향 즉 행위의 주체는 나이며 그 나는 자의식을 가진 자아이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니체의 전복이 시작된다. “사유는 내가 아니라 그것(es)이 생각한다” 더 나아가 라캉은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interpeller)한다.”란 말에 이어 푸코는 “권력은 주체를 억압하지 않는다. 주체를 생산한다.”로 반응하고, 데리다는 “주체는 자기 자신과 동시적이지 않다.”라는 지극히 비상식적 사유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신들림과 다시 연결하면 <신들림이란 주체가 무너지는 사건이 아니라, 주체가 성립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구조적 조건이다.>로 정식화될 수 있다. 또 돌아가고 있다. 이제 첫 번째 장의 해석은 거의 끝이 나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공인된 철학책을 읽는 것은 히말라야 13좌를 오르는 것과 같다. 한번 주요 문장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독서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