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이나 [아테네의 타이먼]이란 작품 속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교환가치 형태인) 화폐의 유령성(화폐의 신체 없는 신체의 출현)에 주목했다. 특별히 후자는 마르크스가 화폐의 본질과 인간 소외를 설명할 때 즐겨 인용한 텍스트이다. 우선 독자들을 위하여 [아테네의 타이먼]이란 희곡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아테네의 부유한 귀족인 타이먼은 친구나 예술가와 정치인에게 엄청난 부로 우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우정은 대부분 타이먼의 부(富)에 기생한 가짜 관계였다. 타이먼의 재산이 바닥나자 당연히 그가 도움을 청한 우정의 친구들은 모두 외면한다.
그들의 배신에 절망한 타이먼은 도시를 떠나 인간 혐오자(misanthrope)로 변모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땅에서 금을 발견하지만, 그것을 인간을 돕는 데는 더 이상 쓰지 않고 전쟁, 부패, 파멸을 조장하기 위해 사용한다. 결국 타이먼은 인간 사회 전체를 저주한 채 고독하게 죽는다. 마르크스는 이미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 속에서 마치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금본위 시대의 화폐(그 이후에는 국가 신뢰도에 따른 법정 가치란 유령적 가치로 전환됨)란 가치는 살아남으나, 반대로 인간적 관계는 붕괴되고 만다는 서사로 이해한다.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타이먼을 직접 언급하였다. 그가 주목한 것은 희극의 비극적 성격이 아니라, 화폐의 전환적 기능이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는 모든 것을 전도하는 힘이며 그의 표현대로 “화폐는 모든 인간적·자연적 성질을 그 반대로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타이먼에서 금은 친구를 배신자로 미덕을 타락으로 사랑을 거래로 뒤집는 매개체이다. 결과적으로 화폐는 가치를 측정하는 수단이 아니라 가치 자체를 대체하는 우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사랑과 우정이나 신뢰라는 미덕이 일종의 화폐로 표현가능한 ‘소유물’로 환원되며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는지가 그 인간을 규정하는 비극적 사회구조에 근거한다.
셰익스피어–마르크스–데리다의 연결 구도는 근대 이후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것의 권력’이란 화폐(금융) 자본주의를 서로 다른 언어로 포착하는 것에 있다. 셰익스피어는 권력은 항상 ‘유령처럼’ 나타난다고 보았으며 셰익스피어에서 결정적인 것들은 햄릿의 유령처럼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즉 유령은 명령하지만,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햄릿은 행동하지 못하고 고민한다. 그가 보기에 오히려 진실은 항상 연극(theatre)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셰익스피어는 현재를 지배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마르크스에게 유령은 ‘상품’의 형태로 돌아온다. 그러나 더 깊은 유령은 '자본'이다. 자본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 강력하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셰익스피어적 유령의 사회경제적 재현이다.
데리다는 유령론을 전개하면서 셰익스피어와 마르크스를 동시에 호출한다. 유령은 오지 않거나, 이미 와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 즉 유령은 현재와 부재, 삶과 죽음, 약속과 기억의 경계를 교란하기에 인간이 바라는 정의는 항상 지연된 도래(à-venir)가 되고 그러므로 그에게 유령은 비유가 아니라 일종의 존재 방식 그 자체이다. 그러나 세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유령에 대한 시각의 차이를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에게 유령의 말은 들리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언어이고, 마르크스는 이 유령을 구조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며, 데리다는 이 유령과 공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유령이 이미 무대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마르크스는 그 유령이 자본의 구조임을 밝혔으며, 데리다는 그 유령을 제거하려는 욕망 자체의 본질을 해체적 언어로 나타내고 있다.
데리다는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화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재해석한다. "우리에게 어떻게 화폐의 실존, 금이나 은 같은 금속 같은 형태의 실존이 어떤 잔여를 산출하는지 설명해 준다. 이러한 잔여는 정확히 말하면 위대한 이름의 그림자로서만 실존할 뿐이다... '주화의 신체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기술하는 모든 관념화의 운동은, 그것이 화폐에 대한 것이든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것들이든 간에, 환영들, 가상들, 허상들, 겉모양 내지 허깨비의 생산이다."
화폐 즉 그것이 주화이든 지폐이든 그것은 항상 국가라는 권력 기구가 개입하여 강제적 통용력 즉 존재하지 않는 유령적 가치를 강제하는 환영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강제통용력 있는 지폐의 국가 발행을 ‘현존하지 않는 것을 현존하게 만드는 유령의 제도화’로 해석한다. 현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애초에 실체를 담보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령이다. 왜냐하면 지폐는 금이나 상품과 직접적으로 동일하지 않으며, 그 가치는 지금-여기에 존재하지 않고, 미래의 교환 가능성, 타인의 신뢰나 법적 약속에 의해 떠받쳐진다. 실제로 미국이 달러를 계속 찍어내는 이유는 달러의 생산이 세계적 소비에 비해 항상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가 부도가 난 국가의 화폐는 휴지조각처럼 변하는 것을 우리는 다 목격했다. 그나마 달러가 미국의 경제력과 국방력 그리고 세계적 공급망과 소비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국가는 자국의 지폐를 사용하는 이용자에 대해 “이것은 가치다. 네가 믿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강제한다. 그러나 특별히 지폐는 주화보다 더 존재하지 않는 가치이며 나아가 물질적 실체가 없는 신뢰를 법과 폭력의 가능성으로 보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유령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유령을 법으로 소환하고 강제한다. 마르크스는 화폐를 사회적 관계의 물신화로 설명했지만, 데리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는 물신성을 잘못된 현존으로, 유령성을 현존하지 않음의 작동으로 그리고 지폐를 더 이상 가치를 잘못 본 물건이 아니라 가치가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작동하는 기호로 해석한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국가가 자국의 지폐에 부여하는 강제통용력은 바로 이 유령성을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제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상품의 변신은 이미, 우리가 정당하게 유령시학/유령생산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미화(美化)하는 이념의 과정이었다. 강제 통용력이 있는 지폐를 발행할 때 국가의 개입은 종이를 금으로 변모시키는 마법과 비교된다. 이렇게 해서 국가가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겉모양, 심지어 허깨비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제 그의 도장의 요술(금을 표시하거나 화폐를 인쇄하는 마술)에 의해 종이를 금으로 변신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마법은 항상 환영들과 바쁘게 일하며, 환영들과 거래하고, 자기 자신을 조작하거나 바쁘게 만든다. 이러한 마법은 비즈니스, 신들림의 요소 자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즈니스가 된다."
국가 화폐(달러나 엔, 위안, 유로 등 기축통화를 포함한 모든 국가 단위 화폐)는 일종의 국가가 만들어낸 유령이기에 각 국가의 중앙은행은 일종의 유령생산소로 불릴 수 있다. 국가는 유령을 제거하지 않는다. 국가는 유령을 독점한다. 그 이유는 사적 신뢰를 국가 독점 신뢰로, 다수의 약속을 하나의 법적 약속으로, 분산된 미래를 중앙은행의 선언으로 변모시키며 이때 지폐는 <가치를 대표하는 기호>가 아니라 국가가 승인한 유일한 유령이 된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시각에서 모든 중앙은행은 유령의 생산 공장이다. 그런데 왜 이 유령은 항상 불안정한가? 화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불안감은 어디에 비롯된 것인가? 금과 은을 사는 사람들이 항상 더 많아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가 아무리 강제해도 지폐는 여전히 유령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금융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국가경제나 세계경제는 항상 인플레이션이나 화폐 위기 혹은 신뢰 붕괴와 국가 부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유령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며. 곧 유령의 복귀인 것이다.
그러면 이 유령을 쫓아내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데리다는 1장의 말미에서 프랑스어 콩쥐라시옹(conjuration: 퇴마술, 축귀술, 유령을 불러내면서 동시에 몰아내는 행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장의 한국어 제목은 <마르크스주의를 푸닥거리하기>이니 적당한 언어적 연결 고리를 찾아낸 셈이다. 그가 사용하는 이 단어의 철학적 의미는 위협적인 것을 불러내면서 동시에 억누르고 무효화하려는 정치, 법, 담론적 의식의 연대이다. "콩쥐라시옹은 무엇보다도 어떤 동맹, 때로는 정치 동맹, 묵언의 동맹은 아닐지 몰라도 다소간 은밀한 동맹을 의미하며, 공모나 모의를 가리킨다." 그에게 콩쥐라시옹이 유령을 봉인하는 의례라면, 새로운 인터내셔널(nouvelle Internationale)은 유령과 함께 사는 정치이다.
이번 에세이는 여기까지이다. 필자의 의도는 데리다의 완독이 아니다. 다음의 현대 철학 책들이 몇 권 기다리고 있다.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다시 조정해야 한다. 난 선배 교수들처럼 유럽의 신이데올로기를 수입하는 수입상이 되기는 싫다. 뭔가 새로운 사유를 위해서 아직 겨울은 많이 남았고 봄도 멀었지만 사유의 다락방은 여전히 따뜻하다. 갑자기 하이데거의 말이 떠오른다. "Denken ist Danken(사유는 감사이다)" 思惟란 한자의 의미는 아주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이다. 思는 田(밭) + 心(마음)이 합친 한자이니 그 의미는 마음이 경작되듯 머무르며 헤아림 즉 계산이나 판단 이전의 머무는 생각을 뜻하고, 惟는 心(마음) + 隹(짧은 꼬리를 가진 작은 새)의 조합이며, 특별히 이 새는 날아오르는 새(鳥)가 아니라, 어디엔가 내려와 멈춰 있는 새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글자는 마음이 한 곳에 깃들어 떠나지 않고 뭔가 본원적 물음의 자리에서 분산되지 않고 제 자리에서 존재의 응답을 기다리는 현존재의 모습을 그려준다.
존재의 사유가 일종의 언어의 집이라면, 언어야말로 실로 유일한 존재의 집이다. 존재가 언어로 도래함은 마치 작은 새가 둥지에 안착하는 것과 같고 나무는 고요히 제자리에서 그 새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새라도 갑자기 새떼로 나타나 가지 위에 앉는다면 데리다가 우려하듯이 새나 새떼는 연역한 나무를 억압하는 또 다른 권력이 될지도 모른다. 해방 세력이 착취 세력으로 변모하는 수많은 사례는 인간 역사가 자유의 진보가 아니라 권력 투쟁과 헤게모니 쟁탈의 악순환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다음에 읽을 책과 해석의 대상은 질베르 시몽댕의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이다. 아마 그 전에 에세이 10에서 데리다와 아감벤 그리고 지젝이나 바디우의 마르크스 해석의 차이나 탈근대적 주체론을 간략하게 비교하고 넘어가는 것이 나을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