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들 해석 10

자유와 필연의 모순

by 박종규

자유와 필연의 관계는 가장 본질적이고 오래된 철학적 담론의 주제였다. 인간은 우선 그 육체나 그것을 관리하는 신경계(혹은 정신) 역시 일종의 필연적인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은 시대나 환경, 교육과 계급을 초월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정신이 가진 고유한 힘은 지속적으로 제한을 넘어가기를 원한다. 외적 제한(제도, 계급, 질서)을 타파하고 더 자유로운 개인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구축하고 내적 제한(욕망, 갈등, 번뇌)의 배후에 존재하는 고요한 마음을 우주적 마음과 연결시켜 정신적 자유를 확장해 간다.


그럼에도 시대마다 개인마다 정말 당신은 모든 조건에서 자유로운가? 아니면 어떤 제한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가?라고 물을 때 당신은 주위를 둘러싼 현실을 바라보면 그렇다고 쉽사리 답을 할 수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타고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어떤 가정에 태어났는가가 미래를 결정하고 나아가 어느 도시에 사는가가 미래를 결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해도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적어도 법이 존재할 근거가 상실된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책임 역시 자유의 근거인 행위의 주체가 존재할 경우에만 가능한 윤리의 영역이다. 외연을 확장하지 말고 마르크스 전후의 논의만을 집중적으로 정리해 보자. 칸트는 근대에서 자유와 필연의 모순을 그 누구보다 정밀하게 분석한 철학자이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연법칙의 필연성을 그리고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법칙의 당위성을 분리하고 그것을 [판단력비판]에서 종합하려 시도했다.


인간의 경험은 경험은 원인-결과의 인과법칙에 따라 결정되기에 인간은 자연계에서 완전히 필연적 법칙 속 존재이다. 사람은 아무리 먹는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한편 칸트는 인간에게는 필연뿐만 아니라 당연히 지켜야 할 당위의 영역이 존재하는데 이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지킬 수도 어길 수도 있는 도덕법칙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당위는 자연의 영역과 달리 인간의 자유의지를 요청한다. '내가 당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이 간단한 도덕법칙은 인간 행위의 매 순간 선택과 책임을 동반한다.

마르크스 철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근원은 독일의 관념론(주체의 형이상학)과 영국의 경제학(경제현상의 법칙화)과 프랑스의 몽상적 사회주의(미래지향의 목표)이다. 그는 관념론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그리고 경제학에서 경제의 과학성을 미래공산주의 사회를 위한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사회구조의 기초인 생산력과 생산관계와 같은 하부구조는 상부 이데올로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실천적 주체성은 자발성을 통해 역사와 사회를 변혁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자유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구조적 제약을 극복하고 자기 해방을 실천하는 의식화된 노동자계급의 초월적 의지를 전제한다.


마르크스는 [자본 3]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던진다. "자유의 왕국은 사실상 필연과 외적 목적성에 의해 규정되는 노동이 멈추는 지점에서야 비로소 시작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상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의 영역 너머에 있다. Das Reich der Freiheit beginnt in der Tat erst da, wo das Arbeiten, das durch Not und äußere Zweckmäßigkeit bestimmt ist, aufhört; es liegt also seiner Natur nach jenseits der Sphäre der eigentlichen materiellen Produktion."

현대철학자들 다수는 특히 구조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와 필연은 대립이 아니라 다른 층위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공간적, 존재론적 분리가 아니라 층위적 분화이다. 1차 층위로서 필연의 왕국은 생존과 노동과 자연과의 물질대사와 욕구 충족의 영역이며 이는 제거할 수도 초월할 수도 없다. 다만 맹목적 필연인가 아니면 합리적으로 통제된 필연인가가 문제이다. 2차 층위인 자유의 왕국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 능력의 영역이며 여기에는 예술과 사유와 관계와 놀이와 정치적 자기 형성이 가능하다. 이 자유는 자연의 반대가 아니라 필연 위에 덧입혀지는 차원이다.


이 구조는 마르크스 이후 현대철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변형된다. 예를 들어 말년의 사르트르는 필연을 응결된 실천으로 그리고 자유를 그것을 초과하는 행위로 번역한다. 즉 두 가지는 동일 층위가 아니라 실천의 깊이 차이인 것이다. 변증법에 내재한 부정성을 강조한 아도르노는 필연을 체계화된 합리성으로 자유를 비동일성의 순간으로 규정한다. 그에게 자유는 층위 사이의 균열이다. 차이와 반복을 강조하는 들뢰즈는 아예 필연/자유 구도를 해체하고 생성의 층위들에서 자유는 새로운 층위의 출현이라고 말한다.

과학적 층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실험으로 입증하려 했던 대표적 사례가 1980년대에 미국의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이 했던 리벳 실험(Libet experiment)이다. 이 실험은 피험자에게 <아무 때나 손가락을 움직이라는 아주 단순한 과제>를 준다. 움직이기 직전에 손가락을 움직이기로 결심한 의식의 순간이 언제인지를 말하게 한다. 동시에 과학자는 뇌파(EEG)로 뇌의 준비 신호를 측정한다. 이때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 몸을 움직이기 이전에 운동피질에서 나타나는 뇌 신호)를 측정하면 다음과 같은 순서가 나온다.


뇌의 준비전위(RP)는 행동 약 550ms 전에 나타나고 이어서 의식적 결심(지금 움직이기로 했어)은 행동 약 200ms 전에 그 후에 실제 움직임이 발생한다. 이 실험은 뇌가 먼저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고 의식은 그보다 나중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리벳은 “의식은 행동의 시작자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과정의 관찰자일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실험은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를 부정했다기보다, 이제까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우리가 생각해 온 방식이 아니었음을 드러냈다. 이 실험 하나로 서구의 철학이나 신학 그리고 윤리학이나 법학마저 그 최종 근거인 의식과 자유 문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유와 필연의 모순을 역사의 변증법적 과정 속에 용해시킨 대표적 마르크스주의자는 게오르그 루카치이다. 그는 주저인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론의 혁명적 기능의 전제인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때는, 의식화라는 것이 역사과정의 고유한 목표--인간의 의지들로 구성되지만 인간의 자의에 의존하지 않으며 인간정신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닌 목표--를 향해 내디뎌야 할 결정적 걸음을 의미할 때... 따라서 그러한 인식에 있어서는 이 계급이 인식의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로 되고... 바로 이러한 상황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 속에 출현함으로써 발생했다.(박정호/조만영 역, 거름 1986, 58쪽 참고)"


역시 철학자의 글은 어렵다. 철학자가 다루는 대상들은 과학자처럼 마음대로 실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역사와 사회는 실험의 장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이 어우러져서 어떤 목표를 향해 진보하고 생성하는 과정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에서 주체이자 객체다>라는 루카치의 명제는 객체를 자본주의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필연으로 그리고 주체는 그 구조를 전복할 수 있는 자유라는 이중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 이중성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유와 필연을 분리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적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려 한 알퀴세르의 출발점은 자유는 이론적 범주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범주이라는 도식이다. 그에게 자유는 칸트적 도덕 주체, 헤겔적 자기화해, 루카치적 계급의식 모두와 연결된 철학적 인간주의의 잔여물이다.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coupure épistémologique)을 통해 기존 철학자들이 다룬 자유의 문제를 추방한다. 그러면 자유란 무엇인가? 그는 자유를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구조의 우연적 공간으로 사유한다. 그는 루카치가 이야기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통일을 철저히 거부하지만 자유를 과학적 결정론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를 과학적으로 정초 되지 않은 결정들의 순간으로만 취급한다.


이제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입장을 비교하면서 마무리하기로 하자. 두 철학자의 사고방식과 접근방식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알튀세르는 자유를 이론에서 추방하기 위해 구조를 세웠다면 반대로 데리다는 필연을 끝까지 흔들기 위해 구조를 해체한다. 알튀세르에게 필연은 구조적 인과성이자 주체 없는 과정이며 재생산의 필연성이지만 과거의 철학자가 생각했듯이 이 필연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이론적으로만 안정된 필연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구조는 설명되지만 자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데리다는 필연이라는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법칙은 항상 예외를 필요로 하며, 구조는 항상 자기 외부를 호출하고 반복은 항상 차연(différance)을 낳는다

자유의 문제 역시 두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알튀세르에게 자유는 이데올로기이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결정은 있으나 과학적으로 정초 될 수 없는 이론 밖의 침묵 지대이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자유를 아예 정의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유 대신 결정 불가능성, 도래할 것 혹은 사건성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선택의 능력이 아니라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결정이기에 <규칙이 완벽하면 자유는 없고 규칙이 전혀 없으면 자유도 없다>는 것이다. 자유는 이 사이의 균열에서만 발생한다. 사실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철학적 사유는 모든 사고의 고정화된 틀을 깨는 데 가장 적격이다. 이제 시몽댕의 책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을 먼저 알아보자. 시몽댕에게서 <자유와 필연은 대립하는 항이 아니라, 개체화 과정 안에서 서로 다른 층위로 작동하는 긴장>이다. 여기서 핵심인 단어는 <개체화 과정>이란 말이다. 이 개념을 디딤돌로 삼고 데리다의 책은 그만 읽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