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동의 개체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 1

현상학의 계보에서 본 시몽동의 철학

by 박종규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이란 이름에 익숙한 독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40년대 파리 고등사범학교(ENS)에서 공부한 학자이지만 그의 선배 격인 장 폴 사르트르나 모리스 메를로퐁티 그리고 1939년에 입학한 루이 알튀세르나 그 후 1952년에 입학한 자크 데리다 그리고 시몽동의 진가를 미리 발견하고 발전시킨 질 들뢰즈에 비해 생애 주기에서 그렇게 유명한 학자로 명성을 날리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들어서 가장 21세기적인 철학자로 재평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21세기 중반의 지성들에서 가장 강력한 과제로 떠오른 주제는 단연코 AI/기술철학에 대한 새로운 사유일 것이다. 시몽동이 현대의 기술철학과 과학철학 그리고 새로운 존재론에 대한 담론에서 점점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있는 철학적 위상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후설의 현상학 이후에 전개되는 현상학의 계보들에서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몽동이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철학자는 역시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란 사람은 도대체 현대 철학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는 빈 대학에서 수학과 논리를 공부하였고 당시에 유행하던 심리학도 함께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인간의 내적 심리의 내용에 대한 경험적이고 임상적인 탐구가 아니라 그 심리 현상의 근거에 있는 <의식의 지향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주저인 [이덴 1]의 핵심 구조는 인간의 지향적 의식은 노에시스(의식작용)와 노에마(의미체) 그리고 센서스 힐레(감각적 질료)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있다. 인간의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여러분의 의식은 내부의 관념이든 아니면 외부의 물체이든 항상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향적 의식활동의 결과이다. 의식의 지향성이란 마치 내부에서 마음의 빛이 어떤 감각적 자료에게서 의미를 형성하여 그것을 저장하고 연결하는 것과 같다.


의식에서 지향된 이 빛이 마음의 내/외부에 나타난 어떤 감각적 재료에다가 의미를 부여하여 내면에 데이터 베이스를 쌓는 작업이 바로 의식의 지향성이다. 예를 들어 눈앞에 하늘로 솟은 직삼각형의 형태인 고동색 골조를 가지고 녹색 타원형들을 매단 어떤 물체가 나타날 때 마음의 빛은 그것에다가 나무라는 의미를 생성시키고 그것은 다시 내면에서 나무라는 의미체로 저장되고 다른 의미체와 연결된다. 즉 인간의 경험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에시스에 의해 힐레가 조직되어 노에마로 구성된다. 그러면 이것이 소위 칸트가 말하는 구성론과 무엇이 다른가? 단적으로 말하면 대상이 인식 조건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 칸트의 인식론이라면 세계가 의식의 지향성 속에 주어진다는 것이 후설의 현상학이다. 대부분 상식적 실재론의 사고를 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이런 말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일단 철학의 주 특기는 <기존 사고의 뒤집기>이니 뭐든지 거꾸로 생각해 보면 뭔가 다른 시각이 생길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전문적으로 흘렀다. 그냥 쉽게 소비되는 품질의 에세이를 쓰려면 아예 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독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글은 누군가를 위한 글이기 전에 필자가 가진 의식-소프트웨어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것이다. 다시 개관하자면 현대 철학에서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이 가지는 의의는 과학으로 세분화되기 이전에 일반 학문의 총체였던 철학의 기초인 형이상학이 존재 자체를 묻던 방향에서 후설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방향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과거의 형이상학은 이미 이 세계가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었고, 근대의 인식론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초점을 전환시켰다면 후설은 이제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물음으로 바꾼 것이다.


이 물음에서 거의 모든 현대철학이 새로운 분기점을 맞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흐름이 바로 마르틴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이 의도한 존재자와 존재의 구별에 중심을 둔 존재론적 현상학, 혹은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세계 내 존재 즉 현존재로 사고되며, 현존재의 본질이 바로 실존으로 명명된다. 이제 실존철학의 탄생지점이 발생한다. 이와 달리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의식 이전에 몸의 지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지각의 현상학]이란 저서를 집필한다. 질베르 시몽동의 박사학위 [개체와 그 물리=생물학적 생성]이란 논문은 퐁티의 그의 저서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한단계 넘어서기 위함이다.

퐁티와 시몽동의 공동 시각은 우선 존재는 완성된 실체가 아니며, 주체/객체의 이분법은 인위적이며, 세계는 과정적이며 발생적이기에 관계는 부차적이 아니라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특히 메를로퐁티에게 존재는 이미 세계 속에서 얽혀 드러나는 현상적 장이며, 그의 관점에서 존재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 속에 이미 얽혀 있는 몸이다.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란 저서에서 "세계와 몸은 같은 직물로 이루어져 있다.(Le monde et le corps sont faits de la même étoffe.)"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몽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는 존재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잠재적 장에서 개체가 발생하는 과정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에게 개체는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다. 그러므로 "개체화는 개체에 앞서 사유되어야 한다.(L’individuation doit être pensée avant l’individu.)"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시몽동의 철학이 기술철학이나 AI 윤리 담론과 만나는 시대적 당위성을 살펴보고 첫 에세이를 마치기로 하자. 우선 시몽동은 현대 철학에 <기술적 존재(technical beings)>를 존재론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거의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존재론을 개체에서 개체화 과정으로 전화시켰으며 이 전환은 인간이 이미 완성된 주체이며 기술은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이고 책임은 행위자에게 귀속된다는 근대적 윤리 이면에 있는 주체를 과정 특히 인간과 기술이 공동 과정 속에서 공동 개체화(co-individuation)된다고 말한다. 즉 인간과 기술은 서로를 개체화한다.


아마 여러분이 지금 AI를 사용하면서 어떤 작업을 진행 중이라면 이런 사실을 즉각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물음은 여전히 산재하여 있다. 과연 AI가 만약 스스로 학습하여 결론을 도출한다면 그 개체화에 대한 책임은 프로그래머나 개발조직에게 있는가? 아니면 서비스 제공자나 플랫폼 경영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한 사용자에게 있는가? 이를 다시 통합하여 물으면 다음과 같다. "만약 AI가 진짜로 ‘개체화(individuation)’ 수준에 도달한다면, 그 존재의 행위 책임은 어디에 귀속되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음 에세이에서는 책의 서론 부분을 해석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