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동의 개체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 2

개체로서 존재자에 대한 두 가지 고찰 방식

by 박종규

저자는 서론에서 전통 형이상학이 ‘이미 완성된 개체’를 출발점으로 존재를 이해해 온 방식을 비판하면서, 존재자의 실체성을 고찰하는 두 가지 상이한 길을 구분한다. 우선 "실체주의적 방법인데 이는 존재자를 자신의 단위로 구성된 것, 자신에게 주어지고 자신 위에 기초하여 [타자에 의해] 발생된 것이 아닌 것, 자기 자신이 아닌 것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는 고전적 실체 중심 접근 방법이다. 예를 들어 소금이란 사물은 그것에 속한 여러 가지 속성 즉 짠맛, 결정체의 형태, 물에 녹는 성질, 희거나 붉은 색채를 가진 어떤 개체로 우리의 주관 앞에 존재한다. 상식적인 눈으로 보면 이 속성들은 소금이란 실체의 고유한 속성들의 집합으로서 소금 아닌 것 즉 설탕과 같은 것에 저항하는 것으로 차별화된다.


벌써 난해해지기 시작한다. 그의 글쓰기 역시 영미철학자들처럼 개념-분석적이지는 않으나 논지는 분명하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상이한 길에 대한 다음 설명문은 번역의 한계가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일차적 대상이 일반 독자가 아니라 학위논문의 심사자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책이 단순히 대중을 위한 도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두 가지 길을 다음의 문장으로 통합하여 기술한다. "실체주의적 사유로부터 자기 자신에 집중된 일원론은 형상질료적 도식의 양극성에 대립한다." 여기서 주 개념은 일원론과 양극성이다. 우선 형상질료적 도식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주저 [형이상학]에서 실체의 두 가지 측면을 의미한다.

서론의 처음 단락에 사실 시몽동이 고민하는 지점이 바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고전적인 실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일원론(개체 안에 본질적 형상이 질료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상)과 원자론적 일원론(물질적 원자가 기계적인 법칙으로 독자적인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상)을 구분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실체론이 모두 다 개체화의 원리가 먼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형상질료적 방식은 목수의 목공일을 생각하면 가장 쉬울 것이다. 목수는 가구의 형상(설계)을 먼저 도안하고 그다음 나무라는 재료(질료)를 선택하여 형상을 개체화한다. 여기 있는 이 나무의자는 그런 구조로 하나의 개체로 사용된다.


원자론 역시 미리 주어진 원자들이 결합하여 개체를 이룬다는 구조를 가진다. 그런데 원자 자체가 이미 가장 작은 개체이다. 그러므로 개체들이 모여서 개체를 만든다면 그것은 개체라기보다는 복합체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이론 역시 진정한 개체화의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몽동은 개체보다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는 전개체적 실재(réalité préindividuelle) 혹은 전개체적 존재(être préindividuel)를 가정한다. "전개체적 존재는 상이 없는 존재이다. 개체화가 그 안에서 수행되는 존재는, 존재가 상들로 분배됨에 의해 그 안에서 해소가 나타나는 그러한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생성이다. 생성은 존재자가 그 안에서 존재하는 틀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차원이며, 퍼텐셜(잠재력)들로 가득한 초기의 양립불가능성의 해소 상태이다."

물질적 현상으로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비가 내리기 전에 그리고 번개나 벼락이 치기 전에 일종의 저기압 상태에서 수분의 밀도가 높아지고 뇌우 발생의 가능성이 과포화상태에 있는 기상 조건을 일종의 전개체적 존재로 본다면, 번개가 치며 구름 속에 전기 성분의 불균형이 해소되는 순간을 개체화로 그리고 그러한 과정 자체가 바로 생성으로 본다면 존재와 생성은 대립되는 차원이 아니라 존재가 개체로 발생하는 방식 그 자체가 생성이 된다. 그리고 이 개체화는 완성의 상태가 아니라 생성의 상태이기에 가장 쉽게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다시 열매를 맺고 떨어져 다른 잠재력의 상태로 돌입하는 전체의 흐름으로 인식하는 것이 개체화의 원리이다.


그래도 용어들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과연 이제 철학마저도 일상을 떠나 양자역학처럼 이해불가능한 영역으로 돌입하는가? 그러나 양자역학은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워도 응용이 가능한 전자기기들을 통해 사용할 수 있는데 철학자의 이런 이론은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진도가 나가지 않으면 창밖의 경치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사유를 잠시 중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정보가 과잉되면 머리에서 번개가 칠 수도 있다. 어쨌든 시몽동이 생각하는 사유의 과제는 과학처럼 개체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화의 작동을 따라가서 이미 주어진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가 형성되는 생성의 질서를 새로운 철학적 관점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의 개체화 이론은 정보기술에 대한 첨단적 이론인 노버트 위너나 섀넌의 정보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변형하며 독창적 사유에 만들어 내었고, 훗날 들뢰즈의 차이와 생성 철학,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만을 미리 인지하자. 그래야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난해하게 사고하며 그 결과가 현대 학문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기존의 형이상학을 붕괴시켰고 그리고 그의 존재 사유 즉 반-과학기술적 사유를 시적 사유로 비약시켰으나 시몽동은 현대 과학의 결과들을 충실히 수용하고 그것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축하려 한다. 왜 형이상학인가? 어차피 인간은 형이상학적 물음에 노출된 존재가 아닌가?


봄비가 내린다. 문뜩 두보의 시가 떠오른다. 春夜喜雨 (춘야희우) 好雨知時節,當春乃發生。隨風潛入夜,潤物細無聲。野徑雲俱黑,江船火獨明。曉看紅濕處,花重錦官城. 좋은 비는 때를 알아, 봄이 오면 내리기 시작하네. 바람 따라 밤 속으로 몰래 스며들어, 만물을 적시된 소리조차 없구나. 들길에는 구름까지 온통 어둡고, 강 위의 배 불빛만 홀로 밝아라.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바라보니, 꽃이 무겁게 피어 금관성을 덮었구나. 이 시를 시몽동의 언어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AI에게 명령어를 넣어보았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好雨知時節 — 좋은 비는 때를 안다” 시몽동에게 ‘때를 안다’는 것은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공명의 문제다. 비는 봄의 전개체적 장(場) — 싹트려는 잠재성,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생명의 에너지 — 과 위상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내린다. 비가 “안다”는 것은 주체가 정보를 처리한다는 뜻이 아니라, 두 계(系, système)가 서로의 특이점(singularité)에 응답한다는 뜻이다. “隨風潛入夜 / 潤物細無聲 —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신다” 이것이 바로 시몽동적 변환(transduction)의 시적 형상이다. 변환은 폭력적 강요가 아니다. 비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대지의 구조 안으로 침투하여, 접촉하는 모든 것을 새로운 개체화의 국면으로 이끈다. “소리 없음(無聲)“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라, 강요 없이 이루어지는 정보 전파의 이상적 형태 — 저항 없이 구조가 전달되는 상태다.


“野徑雲俱黑 / 江船火獨明 — 어둠 속 홀로 밝은 불빛” 시몽동은 개체화가 배경(fond)으로부터 형태(figure)가 분리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온통 검은 밤(전개체적 연속성, 미분화 상태)을 배경으로, 배의 불빛만이 홀로 개체화된 존재로 빛난다. 이 대비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전개체적 장에서 특이점이 출현하는 순간을 가시화한 것이다. “曉看紅濕處 / 花重錦官城 — 꽃이 무겁게 피어 성을 덮다” 마침내 개체화가 완성된다. ’ 무거움(重)’은 결실의 충만함이다. 시몽동에게 개체화의 결과는 이전 전개체적 에너지가 형태로 안정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꽃은 완결이 아니다 — 꽃은 다시 씨앗이 되고, 새로운 전개체적 잠재성으로 돌아간다. 두보의 시는 그 순환하는 위상차의 한 국면을 포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보의 봄비는 시몽동의 눈으로 보면 우주적 개체화 과정의 서정적 기록이라는 것이다. 비(준안정적 물의 계)와 대지(잠재적 생명의 계)가 위상을 맞추어 변환을 일으키고, 어둠이라는 전개체적 연속성 속에서 꽃이라는 개체가 출현한다. “소리 없음”은 최선의 정보 전달 방식이며, “때를 앎”은 두 계(系)의 내적 공명이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이 시는 봄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방식을 노래한 것이다. 이 정도의 해석이라면 이제 AI와 인문학자의 협업이 상호 개체화의 장을 열어간다고 보기엔 아직 무리일까? 아니면 새로운 전개체적 잠재성의 시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