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동의 개체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 7

실체와 개체

by 박종규

형태와 에너지의 장 후반에서 시몽동은 마치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사를 <존재망각의 역사>로 부른 것처럼 자신의 철학 이전의 모든 서양철학이 <개체무시의 역사>라고 말한다. "서양철학의 전통은 거의 전체가 실체론적이다. 그것은 개체를 발생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여 진정한 개체의 인식을 무시하였다. 분할불가능하고 영원한 분자이든, 또는 풍부하게 유기화된 생명체이든, 개체는 존재자들의 구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우주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 주어진 유용한 실재였으며 그 자체로 인지가능한 실재로 파악되지는 않았다."


이제 간략하게 서양철학에서 실체와 개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실체 (substance)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고, 개체 (individual)는 나누어질 수 없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실체(οὐσία, ousia, 우시아)는 존재의 기초를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의 기반이다. 예를 들어 소금이란 실체는 입에는 짜면서 물에 녹기 쉬우며 입방체의 결정 구조를 가지며 흰 빛을 주로 띤다. 이것들을 속성이라고 부르며 이 속성들의 기반으로서 일종의 존재 근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금은 짜다>라는 주어와 술어는 실체와 속성으로 나누어진다.

플라톤에게 진정한 실재는 현상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초월적인 이데아 즉 형상이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형상이 개별적인 실체 즉 개체 안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형상-질료라는 이분법은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중세철학에 이르면 실체는 substantia(sub-stare: 아래에서 지탱하다)로 표현되었고 개체는 individuum(in-dividere: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불려졌다. 중세철학 후반에서 가장 중점이 되었던 보편논쟁(보편과 개체 중 무엇이 더 실재적인가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아마 철학개론 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제1실체를 개별적인 것 즉 구체적인 이 사람, 이 꽃, 이 돌로 그리고 제2실체를 보편적인 것 즉 우리가 오늘날 생물학적 분류로 사용하는 <류와 종의 보편적 의미>로 구분하였다. 1 실체가 구체적으로 내 앞에 존재하는 아무개라면 2 실체는 인류 혹은 호모사피엔스라고 부를 수 있다.


보편논쟁을 조화롭게 화해시킨 사람은 스콜라철학의 완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실체가 형상과 질료라는 구조를 가지지만 지정된 질료(materia signata: 같은 종이라도 구체적인 몸 때문에 개체가 됨)라는 개체화 원리를 도입한다. 그러나 근대철학에 이르러 다시 데카르트에 의해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실체 중심의 이원론으로 분리된다. 데카르트는 정신을 res cogitans(생각하는 실체)로 그리고 물질을 res extensa (연장된 실체)로 구분한다. 칸트에 이르게 되면 실체는 더 이상 사물 자체가 아니라 인식의 범주로 주관에 내재하는 오성의 형식으로 내재화된다. 그리고 개체는 경험 속에서 구성된 대상(현상)이 된다.

하이데거에 이르러 실체 대신 존재(Sein)가 강조되고 특별히 인간 개체는 현존재(Dasein)라는 이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 현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내-존재로서 세계에 던져졌기에 그는 생각하기 전에 이미 뭔가 근심하고 염려하고 고민하는 존재로 드러난다.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자가 바로 인간이라는 현존재이기에 이런 현존재의 본질을 그는 실존이라 불렀다. 그 이후 "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 Das Wesen des Daseins liegt in seiner Existenz."라는 그의 말은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문장이 되었다.


시몽동은 직접 하이데거의 사상을 계승하지는 않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후설에서 메를로퐁티로 이어지는 현상학적 전통을 계승한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가 해석학적 차원으로 이행한다면 시몽동은 과학과 발생적 사유를 연결시키는 프랑스적 전통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몰두한 반면 시몽동은 존재의 발생 메커니즘을 추적한다. 그가 자신의 책 서론 앞에 <모리스 메를로퐁티를 기억하며>란 문구를 붙인 이유에 주목하자.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현상학을 지각의 현상학으로 변형한다. 여기에서 지각이란 구체적으로 몸의 지각을 의미한다. 그에게 인간은 주관이라는 의식이기 전에 몸(corps)이며, 세계는 객관적 대상 즉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지각의 장(field)이며, 몸과 세계는 이미 이 장으로 얽혀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이나 과학의 주관-객관의 분리적 사유로는 이 장에서 발생하는 개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식론은 그 뿌리에 이르기까지, 즉 감각과 지각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변형되어야 한다. 감각은 생명적 개체와 그것이 처해 있는 환경과 관계로 나타남에 틀림없다.... 이러한 관계의 인식론은 개체존재를 정의된 것으로 가정하고서 제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기 이전에 지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물리학에서 빌려온 범례로부터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단지 그 이후에 우리는 이 출발점으로부터 반성적 성과들을 도출해 낸 것이다." 시몽동은 하이데거처럼 기존 철학의 변형이 아니라 그것의 한계를 지적하고 개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위하여 전통 철학이 아니라 현대 물리학에서 빌려온 범례 즉 열역학의 법칙과 고체의 결정화 과정을 도입한 것이 불가피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에서 희랍 자연철학자의 재해석에서 릴케나 휠더린과 같은 시인의 사유로 귀결한 하이데거와 현대 과학을 통합하여 개체화 과정의 구조를 밝힌 시몽동과의 철학적 차이가 있다.


마지막으로 두 현대 철학자가 자연(Nature)을 바라보는 시차의 층위를 비교하고 마치기로 하자. 왜냐하면 현대 철학자의 근본 관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곧 그것이 자연과 문명으로 분리될 수 없는 한 지구에서 공존하는 모든 생태적 관계의 근원을 추적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이 지구 자체는 물론이고 모든 생태계의 층위에 공존하는 존재자 전체의 공멸 위기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의 경제 체계가 불러온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그리고 부채증여가 위기의 기원이라고 비판하지만 하이데거와 시몽동은 마르크스주의 역시 주-객(인간-자연) 분리의 층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위기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마르크스 자신은 인간의 자연화와 자연의 인간화가 미래 공산주의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독일 관념론의 주관주의와 영국 경제학의 객관주의 시각의 분리가 여전히 존재한다.

하이데거에서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은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이 사유한 자연(피시스, φύσις, physis: 스스로 솟아오르며 드러나는 것)의 현상(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을 근대적인 관찰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 드러남에 참여하는 현존재 즉 존재가 바로 그 자리에서 존재의 집인 언어로 도래하는 것을 마중하는 현장인 유일한 존재자이기에 바로 거기(Da-)에 있음(sein)으로 불린다. 시몽동에게 자연은 개체화 이전의 잠재적 장으로서 전개체적 장(pré-individuel: 아직 개체가 되지 않은 잠재적 에너지와 정보의 장)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과정이다. 하이데거의 질문인 <존재는 어떻게 드러나는가?>는 이미 있음(Sein)이 전제되나, 시몽동의 질문은 <존재는 어떻게 생겨나는가?>이기에 존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생성되는 과정이다. 다음의 본문을 사색하며 마치기로 하자.


"개체의 존재론적 선행성을 결론짓는 것은 관계의 모든 풍부한 특징을 놓치는 것이다. 결정과 같은 물리적 개체는 추가적 구조를 가진 존재자이다. 이 존재자는 물질과 에너지를 포함하는 구조적 조건과 형상질료적 조건을 양립가능한 관계 속에서 만나게 하는 발생으로부터 유래한다... 개체의 발생은 구조적 싹이라는 불연속체와 선행하는 무정형 환경이라는 가능적 연속체를 요구한다." 구조적 싹(germe structural: 구조를 낳는 싹)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그 안에 모든 미래의 구조가 결정된 이미 완성된 형태가 아니고 전체를 지배하는 원형(형상)도 아니며 국소적(local)이고 미소한 차이지만 전체 구조를 조직화하는 방향성을 제공하는 정보적 계기이다.

예를 들어 고전적인 사유 형태에서는 농부가 씨(종자)를 심을 때 복숭아를 심으면 복숭아씨가 발아한 싹에서 줄기 그리고 나무와 나무 가지의 열매가 열릴 것이 씨의 정보(형상) 안에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토양에 따라 열매의 맛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복숭아나무에는 복숭아가 그리고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열린다. 그러나 아예 씨가 발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자연의 환경에 의해서 혹은 인간의 간섭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개체의 과일은 씨에서 열매로 그리고 열매에서 다시 씨로 개체화되는 과정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 역시 정해진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환경은 무정형 환경(milieu amorphe: 형태 없는 환경, 비구조적 매질)은 아직 구조화되지 않았지만, 잠재적 에너지를 품고 있는 장을 의미한다. 여기까지만 이해하고 다음 에세이로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