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동의 개체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 8

형태와 실체

by 박종규

책의 1부 3장에서 저자는 형태와 실체란 제목으로 고전적인 실체-철학의 패러다임을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을 동원하여 새로운 개체-철학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열역학이나 금속화학은 어느 정도의 과학적 지식이 있으면 이해할 수 있으나 사실 양자역학은 그것을 전공한 학자들도 말하듯이 일상 언어로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양자역학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쓴 많은 책들이 양산되어 있기에 그중 저명한 학자들의 책 몇 권 정도 읽으면 전문가 수준은 아니더라도 일종의 수사적 유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개념들이 바로 양자요동(Quantum Fluctuation: 아무것도 없는 상태도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이나 양자도약(Quantum Jump: 변화는 연속이 아니라 불연속적이다) 그리고 파동역학(Wave Mechanics: 입자는 사실 파동으로 퍼져 있다) 등이다.


이 장에서 처음 제목으로 떠오른 주제가 바로 <연속과 불연속>이다. 여기서 저자는 서양철학사를 우선 개관한다. 희랍에서 발생한 철학은 그 후 서양학문의 모태가 된 자연철학이었다. 물론 고대의 자연철학은 현대의 자연과학처럼 자연 안에 신성이 혹은 신성한 물질이 내재한다는 고대인의 시각으로 출발하기에 통상 물활론(物活論: 모든 사물은 살아 있다는 사상)으로도 불린다. 자연철학의 시조 탈레스는 "모든 것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πάντα πλήρη θεῶν, 판타 플레테 테온)”이라고 말하면서 신화적 세계관에서 이성적 세계관으로 고대인의 사유를 전환시켰다. 만약 우리가 신들이란 개념을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아니라 현대 물리학자들이 표현하는 에너지의 장과 연관시킨다면 어느 정도 대비는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같은 의미는 아니다.

시몽동은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자의 관심의 세계의 본질 즉 자연의 근본 물질(물이나 불, 공기 등)의 탐구에서 인간의 내면의 소리(소크라테스에게는 다이몬)에로의 전회가 후대의 철학사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플라톤의 표현에 의하면 '땅의 아들들'은 물리적 자연의 인식 속에서 개인 윤리를 위한 견고한 원리를 찾을 것을 고집한다. 이미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가 그 길을 보여 주었다. 에피쿠로스는 윤리설을 자연학에 기초한다. 이러한 동일한 행보는 루크레티우스의 교훈적인 서사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철학과 자연학 사이의 관계에 주목할만한 특징은 윤리적 결론이 자연학의 원리 안에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연학은 이미 윤리학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 이후 자연과 인간의 분리가 서양 학문의 주류 역사에서 진행되어 온 시각들의 한계(개체에 대한 무시)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는 '땅의 아들들' 즉 레우키포스에서 루크레티우스에 이르는 유물론자들이 단지 물질의 근본만을 탐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인간의 윤리적 원리를 도출하기 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근대에서 현대 초기까지만 해도 자연과학은 사실의 영역에 그리고 인간과학(인문-사회과학)은 가치의 영역에 관여하는 것으로 구분되어 왔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원자론자들은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진다고 본 것은 인간이 신화적 신들의 세계에 갇혀 살지 말고 이성으로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고 평정심을 같고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는 자연의 원리를 알면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평온(아타락시아)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이런 사상은 이미 동양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으로 공자가 직접 저술한 주역의 계사전에는 "元亨利貞 天道也 仁義禮智 人道也(원형이정 천도야 인의예지 인도야: 자연의 원리가 곧 인간 윤리의 근거가 된다)"란 말이 나오고, 송대 이후 편찬된 성리대전에서는 "元亨利貞者 天之所以然也 仁義禮智者 人之所當然也(원형이정자 천지연이연야 인의예지자 인지소당연지: 원형이정, 다른 말로 춘하추동은 자연이 그렇게 작동하는 근거이고 인의예지, 즉 인간의 예법은 인간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당위, 윤리이다)란 말이 나온다. 노자의 도덕경 25장 역시 이런 원리를 보여준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문장 역시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그러나 시몽동이 보기엔 고대인의 어떤 사유도 어떤 개체 심지어 물리적 개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물리적 개체의 탐구는 고대인들에게 풍요롭지 않은 것으로 남게 되었다. 그것은 윤리적 동기로 인해 실체적인 절대성의 발견으로만 지나치게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도덕적 사유는 아마도 상당히 간접적으로나마 자연학에서 개체의 탐구에 기여한 듯하다. 윤리학에서 자연학적이지 않은 기초를 주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자연학의 개체연구에서 그 도덕적 원리의 국면을 제거하였고 이것이 자연학의 개체연구를 해방하게 된다." 과연 이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기독교가 오히려 개체연구를 어떻게 해방했을까?


겉으로 보면 기독교의 메시지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윤리적 중심(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 강조로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신학적 틀에서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연을 신의 창조적 질서가 이미 내재한 세계로 즉 인간의 행위와 분리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윤리가 자연에서 빠지면서 인간의 주관으로 자연을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물을 그냥 있는 그대로 관찰하게 되고 나아가서 개체 하나하나를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토대를 만든 것이다. 시몽동의 관점으로 보면 고대는 자연을 윤리적으로 봐서 개체 연구가 막혔고, 기독교는 윤리를 자연 밖으로 분리해서 르네상스 이후 오히려 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자유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시몽동에 의하면 18세기말부터 물질의 불연속성에 기능적인 역할이 주어졌다고 한다. 예를 들어 "화학에서 분자는 관계들의 중심이 되고 더 이상 단지 물질성의 저장고인 것만은 아니게 된다. 19세기는 요소적 입자를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빈곤하게 만듦에 따라 그것을 계속해서 관계들로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 길에 의해 사람들은 입자를 장에 연결된 것으로 고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현대의 물리학이나 화학에서 불연속성인 입자는 더 이상 독립된 점이 아니라 전기장, 자기장, 에너지장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장 속에서 생기는 하나의 효과로 보기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역학 중 특히 파동역학의 원리를 이해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파동역학의 핵심 공식은 소위 슈뢰딩거 방정식(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1926년에 제안한 양자역학의 기본 방정식으로 미시 세계에서 입자의 운동과 상태 변화를 기술하며, 파동함수 Ψ를 통해 입자의 확률적 존재 양상을 수학적으로 표현)으로 불리는 원리이다. 이 식에서 핵심요소인 파동함수 Ψ 는 입자의 상태를 나타내지만 이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환경(장)에 따라 계속 변하는 원리를 수학적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입자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 우주의 기초로서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단순한 실체)와 같은 독립된 개별체가 아니라 공간 전체에 퍼진 파동이며 관측 순간에만 입자처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파동역학에 의하면 전자장, 전자기장 등의 장이 먼저 있고 그런 후에 입자는 그 장에서 일어난 진동 모드이고 굳이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바다(장)가 먼저 있고, 파도(입자)는 그 위에서 생기는 것과 유사하다.

시몽동은 현대 과학의 여러 가설과 이론들을 일일이 검토하고 예를 들면서 서서히 자신의 시각으로 다가가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일이 그가 제시한 과학적 모형들을 따라갈 수 없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사유의 숲을 보는 것이지 사유의 대상인 나무들의 개체를 일일이 조사하고 그 종류의 군집 형태를 파악하는 과학적 탐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형태와 실체>에 대하여 과학적 가설들을 검토한 후 그가 도달한 결론을 살펴보자. "그러한 가설들은 모든 생성을 앞서는 기본적 개체, 최초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한다. 하나의 군 안에 개체화가 있다. 최초의 실재는 전개체적이며, 개체화의 결과로써 이해된 개체보다 더 풍부하다. 전개체적인 것은 연대기적이고 위상학적인 차원성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연속체와 불연속체의 대립, 입자와 에너지의 대립은 실재의 상보적 측면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개체화될 때 그 안에서 돌발하는 차원들이다."


이 단락은 저자의 개체화 이론을 압축한 문장들이다. <최초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앞에서 수차례 들어왔듯이 그는 먼저 개체(원자, 입자)가 있고 그것들이 모여서 변화(생성)가 생긴다는 사유를 반박한다. 시몽동은 처음부터 있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직 나뉘지 않은 상태(전개체적 실체)이다. 전개체적 실체는 가능성, 긴장, 잠재성이 가득한 상태이며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개체보다 더 풍부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는 시작이 아니라 결과 먼저 전개체적 장이 있고, 그 안에서 어떤 구조화 과정이 일어나며 그 결과로 개체가 생긴다. 즉 존재는 관계의 장 속에서 생성되는 사건(효과, 진동, 공명)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시인들이 이미 이런 사유로 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시몽동보다 훨씬 이전에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현대 과학과 공명하지 않았을 뿐. 두 시인의 시를 감상하면서 마치기로 하자. 우선 8세기 중국 당나라의 시인 왕유의 선시(禪詩)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공산불견인 단간인어향: 빈 산에는 사람 보이지 않지만 다만 사람 소리만 울린다)”와 17세기 일본 시인 마쓰오 바쇼의 유명한 하이쿠(俳句)인 古池や 蛙飛びこむ 水の音 (후루이케야 가와즈 토비코무 미즈노 오토: 오래된 연못—개구리 뛰어들고 물소리)에는 비어있는 장에서 울리는 소리와 지금 이 순간 발생하는 사건의 소리가 개체화의 전 과정을 압축하여 그와 이미 공명하고 있는 사실을 시몽동은 과연 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