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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 Aug 14. 2024

당근과 케일

8년 직장생활 끝에 찾아온 달콤한 휴직 기록 1

매년 회사에서 해주는 건강검진 결과지에서 노란불과 빨간불들이 8년째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나 스스로도 빨간불 되기 전에 노란불일 때 멈추자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 것 같다. 다행스럽게 회사에서는 6개월의 휴직을 받아주었고, 나에게는 6개월의 자유 시간이 갑작스럽게 생겨버렸다.


35년 동안 살면서 자유시간이 왔었던 시기가 언제였는지 곱씹어본다. 독립적으로 시간 보내기가 불가능한 유아기를 빼고는 대학생 휴학과 취업 준비 시절이 그나마 어디를 다니지 않고 나 스스로가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휴학했을 때에도 해외인턴을 준비하는 시간, 혹은 인턴기간으로 다 써버렸던 것 같고, 취준생 시절 때에도 매일매일 자소서를 쓰며 뭘 하지 않아도 불안한 마음과 걱정들로 가득한 시간들로 보냈으니 지금과는 다른 쉼이었으리. 그럼 내 인생에서 어느 뚜렷한 목적 없이 쉬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첫 직장에 뼈를 묻기로 한 고리타분한 생각으로 가득한 나에게 60세 전까지는 이런 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먹구름 가득한 생각이 앞섰다. 왜 그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힘들다는 생각만 했지, 쉬면 뭘 할지 생각을 많이 안 해봤을까 후회도 살짝 되면서 유튜브에서 온갖 퇴사, 일상, 연예인 브이로그들도 같이 섭렵했다.  

그럼 뭘 해야 알차고 유익하게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는 것인가 나도 지금부터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당장 떠오른 건 늦잠, 여행, 평일 맛집 투어, 운전, 운동 등이었는데 그동안 한쪽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우선 제일 먼저 할 수 있었던 것은 늦잠! 누워있기의 대명사 isfp에게 더할 나위 없이 쉽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항목으로, 첫째 날부터 알람 맞추지 않고 늦잠을 실컷 자보았다. 매일 12시에  일어나니 하루가 아닌 0.5일을 사는 것 같은 이상한 세상에 사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덕분에 다크서클이 1mm 정도는 올라갔다는 남편의 인사말을 위로 삼으며 계속 실천하기로 했다. 그다음이 문제인데, 평생의 애착인형인 걱정인형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며, 갑자기 째깍째깍 타임워치가 내 뇌 속에 켜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어떡하지 이렇게 잠만 자다가 끝나버릴 수도 있겠네.


본가로 넘어가 오랜만에 외동딸 놀이를 하면서 엄마 아빠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휴직의 목적이 건강이었지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으며, 아빠의 케일즙 추억을 다 같이 나누게 되었다. 몸이 약한 DNA는 아빠와 엄마에게 골고루 물려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잔병치레가 훨씬 많았던 아빠는 결혼 후에 엄마가 매일 아침 만들어주는 케일 주스로 위건강을 찾았다고 하였다. 그전에는 밀가루 자체를 먹을 수 없는 체질이었다고 하니, 생생한 성공후기가 솔깃하였다. 나에게도 위와 신장에 혹이 있다는 얘기를 하였더니 아빠는 당장 착즙기를 주문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하였다.


바로 그다음 주부터 나는 케일즙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케일을 한 박스씩 시켜서 씻고 물기 털고 정리하고 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그 시간도 이상하게 즐거웠다. 할 일이 없는 와중에 생겨버리는 소일거리는 나름 재밌었고, 보람되었다. 하긴 일이 되기 전까지는 뭐든 좋은 것 같다. 첫날에는 케일만 잔뜩 넣고 갈아버렸더니 정말 무시무시한 맛이 되었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다음날부터는 사과, 천혜향, 레몬주스 등을 조금씩 넣어서 쓴맛을 조금은 중화시켜 주었고, 매일 갈다 보니 그날의 기분에 맞는 나만의 레시피도 만들어졌다. 케일 한 박스를 다 먹고 나서는 당근 한 박스를 주문하였다. 제주도 놀러 갔을 때 먹었던 구좌읍의 당근주스를 이제 집에서도 해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설레었다. 마침 제철인 구좌 당근이 집에 도착하였고, 이제 매일매일 당근을 세척하고 껍질 채 토막만 내어서 착즙주스를 만들었다. 신선하지만 달고 맛있는 당근주스였다. 덕분에 우리 집 부엌은 주황과 녹색들로 넘쳐났다. 매일매일 출근할 때마다 주스를 먹는 남편에게도 맛이 어때? 괜찮아?라고 물어보았는데, 맛보다는 내가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느낌이 들어서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사실 나 역시도 그랬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외면했었던 내 건강을 마주 보며 나와 내 가족을 아끼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시간과 노동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동안 아등바등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를 이루려 살아온 나에게 잠깐의 휴식은 선물 같은 시간은 맞지만, 그 시간마저 아등바등하지 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를 찬찬히 돌아보며 하나씩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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