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접수 편
매년 2월경 극지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남극 과학기지 월동연구대원 지원 공고가 나온다. 남극 세종과학기지와 장보고 과학기지에 각각 매년 18명을 파견한다. 월동연구대 모집 분야는 크게 연구직과 시설관리 및 조리직으로 나뉜다. 연구직은 해양, 지질/지구물리, 생물, 대기과학, 고층대기/우주과학 전공 대원들을 기지당 5명씩 모집하고 시설관리 및 조리직은 기계설비와 중장비 (각 기지당 2명씩), 발전, 전기설비, 전자통신, 조리로 구성되어 기지당 총 8명의 대원들을 모집한다. 해상/육상안전, 의료, 기상 대원들 모집은 따로 공고가 나거나 소방청, 병원, 기상청 등에서 파견한다.
연구직은 관련 전공의 학사학위 이상 취득자, 시설관리와 조리직은 해당 분야 N 년 이상 경력과 관련 자격증을 필수 지원 자격으로 한다. 서류 접수 후 1차 서류심사, 2차 필기 및 실기 심사(연구직 제외) 그리고 최종으로 면접심사를 한다. 면접까지 통과하면 채용후보자로 건강검진 및 심리검사 그리고 신원확인이 진행되며 검진 결과가 나오고 약 한 달 뒤 최종합격 소식을 받는다.
2025년도에는 2월 17일에 공고가 떠서 3월 17일까지 한 달 동안 서류 접수가 진행되었다. 서류 작성할 게 꽤 많았다. 수강했던 모든 수업을 총 수강 시간 등을 일일이 입력해야 했다. 경력도 마찬가지다. 자기소개서와 직무기술서도 지원동기, 지원 분야 전문성 확보를 위한 노력 및 성과, 본인의 단점과 해당 단점 극복기, 연구계획서, 조직 생활 내의 갈등 해결 경험, 본인만의 스트레스 관리법, 남극과학기지 근무 기간 동안의 목표 및 각오 등을 작성한다.
초안 작성 및 검토까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일찍 작성을 시작해서 초안을 빨리 완성해 두는 걸 추천한다. 나는 공고를 마감 10-14일 전쯤 봤기 때문에 꽤 부랴부랴 작성해야 했다. 시간 내에 초안을 완성하고 검토까지 마쳤지만 다른 사람에게 2차 검토를 부탁하지 못한 건 다소 아쉬웠다.
전문성 확보는 석사과정때 했던 연구들을 위주로 작성했다. 대학교 3학년 이후로 다양한 미생물학 및 분자생물학 실험실에서 논문을 쓰고 로테이션을 하며, 어떤 연구적 문제들을 풀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 서술했다. 연구계획서는 극지 미생물 생태학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서술했다. 그때 마침 극지 미생물학과 우주생물학에 관심이 커져 관련 논문을 많이 읽은 덕분에 연구계획서와 면접을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서류 단계에서 중요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로, 나와 극지를 잘 연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직업적이고 감정적으로 튼튼한 다리를 설치해야 내가 남극에 왜 가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서술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월동연구대 지원자들은 극지에 가보기는커녕 많이 들어보지도 못한 문외한들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극지와의 접점을 어떻게든 찾아내는 게 합격으로의 열쇠가 아닌가 싶다. 그 접점이 나에게는 극지 미생물학과 우주생물학에 대한 경험과 열정, 해외의 다양한 조직에서 일한 경험 및 빠른 적응력과 소통력일 것이라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둘째는 적극성이다. 여기 장보고 기지에서만 해도 진행되는 생물학 연구는 다양하다. 물범, 펭귄, 갈매기의 행동과 생태, 토양 및 해양 미생물 생태, 해조류와 식물 연구 등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난 미생물뿐 아니라 다른 연구활동에도 참여 및 보조를 희망하는 유연성과 적극성을 강조했다. 실험을 중시하는 미생물학의 특성상 실험실 밖에서는 거의 일 해 본 적이 없었다시피 했던 나는 현장 연구에도 목이 말라 있었다. 특히 그 현장 연구의 환경이 극지라면 더욱더 그랬다. 진심으로 남극에서 어떤 현장 연구가 진행되는지 내 눈으로 보며 참여하고 싶었다.
셋째는 태도와 자기 이해다. 남극에서는 본인 업무 이외에 공동업무도 많다. 공동구역 청소, 식사 당번, 주간 및 야간 당직, 그리고 여러 연구 및 보수 지원 등 할 게 상당하므로 서류 단계에서도 인성 및 태도 또한 많이 보는 것 같다. 남극이 고립된 오지인 만큼, 이와 비슷한 환경에서의 자신을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고립된 환경이나 타지에 오래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어필하면 좋다. 여기서는 내 해군 함정 근무 경력과 코로나19 판데믹 도중 독일 생활이라는 매우 다른 두 고립 경험을 언급한 게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기지는 자신이 가고 싶은 기지를 1, 2 지망으로 선택하면 된다. 둘 다 굉장한 매력이 있다. 지금 와서야 두 기지에 대해 많이 알게 됐지만, 서류 접수 시점에서는 거의 몰랐다. 난 좀 더 남극 깊은 곳에 있고 극야와 백야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장보고 기지에 좀 더 모험심이 발동했다. 극야 때는 쏟아지는 별도 볼 수 있고 오로라도 볼 수 있으므로 세종기지에서 진행되지 않는 우주과학 연구를 장보고기지에서는 하고 있다. 우주생물학도로서 우주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곳에 오고 싶어 장보고 기지를 1 지망으로 선택해 오게 되었다.
지금은 한창 해가지지 않는 백야라서 별은커녕 희미한 달과 강렬한 태양만 보일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