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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IA Nov 19. 2022

설거지 미학

이분법적으로 나눠보자. 밥 하는 사람과 치우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과 설거지 하는 사람. 나는 당연하게도(?) 치우는 사람이자 설거지 하는 사람이다. 가장 큰 이유는 요리를 못해서다. 그 부류에 도무지 낄 수가 없다. 그렇다 보니 요리 대신 다른 것으로 성의 표현하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설거지가 늘었다.


내게 있어 설거지는 일종의 명상과 같다. 바른 자세로 앉아 깊은 심연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명상 수련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고무장갑을 끼고 미리 받아 둔 물에 세제를 푼다. 그러고 나서 크기와 종류, 난이도(오염도의 정도)에 따라 우선 분류 한다. 심호흡 한 번하고 난이도 하 부터 공략 시작. 난이도가 높아질 수록 집중도도 올라간다. 손은 점점 더 바지런히 접시들 사이를 오가고, 몰입감에 압도당한 머리는 텅 비워진다. 단숨에 난이도 최상까지 클리어 하고 나면 온 세상이 깨끗해 보이는 착시를 경험하게 된다.


살 빼기, 돈 모으기, 집 사기 .. 등등 ..  누구나 선망하지만 이루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들에 비해 설거지는 비교적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짧은 시간 동안의 정성과 집중만 있으면 바로 보상이 돌아오는, 매우 정직하고 효율적인 행위가 바로 설거지다. 

비포 앤 애프터가 명확해서 시각적으로도 완벽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같은 접시라 할지라도, 설거지를 통해 비포는 완전히 지워져 버리고, 결국 재탄생한 애프터는 새롭다. 


나는 감히 설거지를 미학(美學)이라 - 스스로만 소심하게 - 정의한다. 반짝반짝 재탄생한 접시들이 같은 자세로 나란히 늘어선 모습은 아름답다. 달그락 소리가 멈춘 자리에는 심증만 있을 뿐, 이미 고요해져버린 공간에서는 깨끗함의 경건함에 넋을 놓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슬픔까지 물기 하나 없이 훔쳐내고 나면 정말로 끝난 걸까 하는 아쉬움에 텅 빈 씽크대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다음 끼니 때가 오면 접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꺼이 더럽혀지고, 당연히 깨끗해지고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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