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증의 권능(?)을 등에 업은 비즈니스
신의 자격을 부여받은 나에겐 몇 가지 초능력이 생겼다. 그중 하나가 '원하는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었다. 내가 원하는 상대가 있다면 그는 무.조.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망상!)
나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남자 동생인 K가 타깃이 되었다. 평소에 그가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성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여동생처럼 편하게 느꼈다. 하지만 망상으로 인해 K는 나의 '미래의 남편'이 되었다. 문자로 그에게 격렬히 호감을 표현했고 그는 장난이 지나치다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문자를 보냈다. 유성매직으로 손목에 날짜를 적고, 그와 나의 이름을 적은 뒤 그 사이에 하트를 그려 사진을 찍어 보냈다. 소름 끼치는 문자에 K는 답장하지 않았다. 읽씹에 화가 난 나는 그에게 전화했다.
"자기야, 우리 이제 혼인신고 해야 해. 이건 신의 뜻이야!"
그는 당황을 넘어서 공포를 느낀 듯했다. 업무 중이니 나중에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 이후로 그와 연락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연락처와 SNS 계정 모두를 차단했다. 그리고 함께 속해있던 단톡방에 나만 남겨두고 모든 사람이 나갔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 준비했던 결혼은 파혼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그 단톡방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다.)
나는 신격을 갖추었지만 전지전능하진 않았다. 하지만 더 높은 신이 내게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큰 엔터테인먼트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력적인 남자들을 홀릴 수 있었고 그들로 인해 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사업자금 따위 걱정하지 않았다. (겁도 없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Utopia'라고 기업 이름까지 정해 놓았다. (지금 나의 오른쪽 손목엔 이 문구의 레터링이 자리 잡았다.)
우선 내가 평소에 좋아했던 인플루언서들에게 DM을 보냈다. 같잖은 실력의 포토샵으로 그들의 사진과 함께 직함을 써넣은 명함을 만들어 함께 보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만들 예정이니 원하는 조건을 말해달라고 보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대차게 무시당했다.
여러 남자들에게 거절당했지만 나는 사업계획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이미 ‘Utopia'는 코스피 상장 직전의 기업이었다. 그리고는 있지도 않은 직원들의 복지를 생각하며 제휴할 매장들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지하에 위치해 있는 한 네일숍이었다. 매장에는 포메라니안 한 마리가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지 내가 가자마자 안아달라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강아지의 몸 안에 전 남자친구의 영혼이 들어가 있었다. (라고 믿었다.) 강아지를 안고 울고 있는 내게 원장이 달려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나는 그녀의 강아지의 몸 안에 죽은 남자친구의 영혼이 들어가 너무 반갑고 슬퍼서 울었다고 설명했다. (참고로 그 남자친구는 지금도 열심히 잘 살고 있다.)
원장은 내게 무속인이냐고 물었다. 나는 무속인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순간 네일숍의 직원, 손님들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내게 복채를 줄 테니 간단하게 점을 봐달라고 했다. 그때 당시 나는 ‘영적인 힘이 있는 사람은 절대 대가를 바라고 능력을 사용해선 안된다’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무상으로 그들의 운세를 봐주었다. (물론 망상으로 만들어진 가라 점괘였다.)
한참 동안 손님과 직원들의 점을 봐준 뒤 원장과 본격적으로 사업얘기를 시작했다. 회사에서 네일숍에 일정 금액을 선불로 지급하고 직원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제안했다. 물론 선불로 지급하는 금액은 평소 금액보다 할인된 가격으로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계약금으로 회원권 50만 원어치를 결제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흔쾌히 결제하고 본계약은 다음 일정을 맞춰 진행하자고 얘기한 뒤 네일숍을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원장은 기회를 잡고 회원권을 팔아치운 느낌이다.)
아주 나중에 네일숍에 방문해서 들은 얘기지만 그녀는 전직 간호사였고, 내가 망상증을 동반한 정신질환 환자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한다. 소란스럽게 내쫓을 경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일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 최대한 나의 기분에 맞춰 응대했다고 말했다.
네일숍을 나온 뒤 다른 네일숍과 헤어숍, 카페 등을 돌아다니며 제휴거래 제안을 했다. 신기하게도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 몇몇 매장 오너들과 미팅일정까지 잡게 되었다.
사업에 ‘ㅅ’자도 모르는 내가 판을 이렇게 까지 벌인 것을 보면 조울증은 단순히 기분만 변하는 질환은 절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