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하는 각오
"M, 무슨 일 있어요? 왜 엎드려 울고 있어요?"
"... 흑흑흑"
"M에게 무슨 일 있는지 알고 있는 학생 있어요?"
"M이 제 옆에 와서 앉고 싶어 했는데, 제가 옆으로 안 가서 좁다고 화내면서 갔어요." R이 말했다.
"자리 때문에 그러니? M, 다시 가보자. 선생님이 그 자리 함께 앉도록 도와줄게"
"필요 없어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저리가요! 엉엉엉"
"R, 혹시 M에게 가서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지 물어봐 줄래?, 많이 울고 있으니."
"같이 앉자. 얼른 와." (R이 M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됐어!! 꺼져버려. 앙앙앙 으앙.."
3학년 미술 수업 중 일어난 일이다. R은 선생님 권유대로 별 일 아닌 일로 슬퍼하는 친구 M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결국 M은 60분 수업 중 40분을 울고도 모자란지 복도 밖으로 뛰쳐나가 구석에 가서 숨어 쉬는 시간이 되기 전까지 울었다. 복직 후 석 달 동안 가르치면서 M에게 감정조절의 문제가 있는 줄 몰랐기에 나로서도 살짝 당황했다. 담임을 급하게 찾았다. M의 울음소리로 원활한 수업진행이 안 되었다. 정신없는 수업이 지나갔다. 40분간 흠뻑 흐느낀 후 M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축구공을 들고나가 쉬는 시간에 신나게 뛰어놀았다.
초등학교에서 수업시간 중 돌발상황이 생기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룹활동을 하다가 의견차이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우는 학생이 생긴다. 감정조절이 어려워 눈물을 보이거나 삐쳐있는 상황의 경우 내가 나서지 않아도 10분 이내로 스스로 감정을 추슬러 어느새 그 학생은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물론 오늘처럼 40분 울 때도 있지만). 하지만, 수업설명 중 학생이 친구에게 일부러 침을 뱉거나 농담을 하며 낄낄거리는 등 도를 넘고 수업에 방해하는 경우, 불가한 일임을 반드시 알려 준다. 저학년 아이들 중에는 어린 아이들이 연필이나 크레용을 던지거나, 몸을 포개어 짓누르는 위험한 장난을 일삼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무엇보다 안전이 최고인지라 이런 경우에는 강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고학년의 경우는 저학년과 다르게, 수업시간에 집중을 안 하고 과제를 안 하는 것은 물론 교사 몰래 학교에서 친구에게 정신적 육체적 해가 되는 일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등 또 다른 고차원적 문제들이 있다.
학교 생활 중 수업도중 생기는 이러한 학생 문제들로 20여 년 전 처음 중학생들을 가르칠때는 학생들에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믿기 어렵지만 수업 후 속상해 운 적도 있었다. 수업시간마다 열정적으로 하나에서 열까지 알려주려고 했다. 학생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 했다. 담임이 아니라 만나는 학생수도 200명 가까이 되는데, 학생 하나하나를 살피며 예뻐해 주고, 개인적인 감정을 다 투영했던 시절이었다. 학부모님들의 피드백이나 그들의 말 한마디에 갈대처럼 흔들렸다. 긍정적인 감정만 있다면야 좋겠지만 매일 6시간씩 학교에서 각 학년별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날의 감정에 매달렸다. 행복하고 보람되는 감정은 당연하고 서운하거나 분노하는 감정을 퇴근 후 집으로까지 끌고 가기가 일쑤였다. 특히나 화가 난 감정은 내 일상에 큰 지장을 주었다. 교사생활 첫 5년은 그렇게 그날 겪은 감정으로 하루를 마감하였다.
이제서야 말하지만, 교사로서 중요하게 느낀 것은 아이들을 대하면서 생기는 상황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인내를 하며 화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상황에 일어난 일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옳고 그른 일만 알려주면 된다. 감정 개입 없이 나는 그것만 도와주면 된다. 또한 일어난 모든 일을 내가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내가 필요하다.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여야 한다.
"엄마!!! 왜 벌써 나간 거야!! 교복을 못 찾아서 늦게 나온 건데."
(높은 톤으로 화내며 아이가 멀리서 뛰어왔다.)
"엄마가 오늘 오전 공연 보러 가야 하니까 7:55분에 나오라고 했잖아. 벌써 8:05이야 어차피 넌 시간도 많으니까 걸어가라고. 늦게 나왔으면 사과를 먼저 해야지..." (낮은 톤)
"내가 왜 미안해? 엄마가 늦든지 말든지. 아침에 공연을 왜 봐..??"(낮은 톤으로 중얼중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가 속상할 것 같다는 생각 안 들어?, 너 학교 갈 때나 약속에 늦었을 때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어떨 것 같아?"(낮은 톤)
"난 엄마가 속상한지 안 속상한지 알바 없어. 엄마도 엄마가 하는 말이 내게 상처가 되는지 안 되는지 생각 안 하고 말하잖아?"(낮은 톤)
"사과 안 할 거면 차에서 내려서 걸어가. 이건 부모로서 이해하기는 어렵다"(서운한 말투로)
"오늘 영하 19도인데 걸어가라고? 엄마는 왜 이렇게 못 됐어? 미안해!!! 됐지?"(낮은 톤으로 화내며.)
"하..."
"..."
예전 같았음 더 잔소리를 하고, 고집을 피워서 아이의 반항을 고쳐보겠다며 차에서 내리게 했을지도 모르겠다한동안 부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퍼붓는 등 아이의 반항적인 말투가 지속되는 일이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강압적인 말투를 쓰거나 언성을 높이면 오히려 나 보더 더 큰 목소리로 화를 내고, 방에 쏙 들어가 버리는 반항적인 행동까지 하기가 일쑤였다. 순간, 이런 상황들이 나의 어린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고쳐먹기를 수백 번. 나는 아이에게 톤을 낮추고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려 했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나의 목소리 톤에 따라 아이의 목소리나 행동에도 변화의 곡선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내가 분명한 문제의 근원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화를 내며 쓰는 빈정거리는 단어를 아이도 사용한다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더니.
아이와 아침부터 (나의 노력으로 이룬 짧은)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 기분이 안 좋았다.
아이가 한 말을 곱씹으며 화가 나기도 했다. 엄마한테 저렇게 말을 하다니. 매일 등교할 때마다 태워주는데.
후. 하. 휴, 한숨도 내고 혼자 중얼거리며 5분 거리에 있는 교회로 향했다.
그렇게 문제의 모닝 오르간 연주를 들으러 갔다. 마을 클래식 축제의 첫날 첫 행사였다.
아침 공연 보러 가기 힘들었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하여 나는 이른 아침을 시작하였다. 좀 더 일찍 아이들과 톰슨 씨의 도시락과 간식을 싸고, 톰슨 씨를 출근시키고,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챙기고, 첫째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아이들을 오전 돌봄이 교실에 등교시킨 후에서야 겨우 온 공연이다. 30분 공연을 보기 위해 3시간을 고군분투한 걸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멋지고 경건한 오르간 연주를 들었지만, 아침에 아이가 나에게 퍼부었던 말은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일도 있다는 모닝 오르간 연주는 패스 하기로 했다.
답답하고 머리가 복잡한 터라 집에 돌아와 새로 구입한 책을 펼쳤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신형철 작가는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번역한 김남주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독일어로 써진 이 시의 출처, 그 시대의 배경을 설명한다. 작가는 이 시안에서의 바뀐 관점을 설명한다. 즉, 이 시에서 '나'는 베를라우, '사랑하는 사람'은 브레히트이다. 시를 쓴 브레히트가 그의 연인 루트 베를라우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고, 나는 네가 필요해. 그러니 나를 위해 살아줘’라는 이기적인 글을 쓴 것이다.
이 시를 쓴 브레히트가 베를라우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신형철은 ‘당신을 사랑해요’와 ‘당신이 필요해요’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연인관계에서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말 '당신이 필요해요'이 부모 관계에서는 자연스럽다. 신형철은 부모 관계에서 나오는 ‘사랑에 대한 조심’을 언급한다.
‘너에 대한 조심’ 그리고 ‘너를 위한 나에 대한 조심’ 말이다.
그의 글을 읽자 내 눈시울이 붉혀졌다.
이제 네 이야기를 너에게 할게.
그러니까 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경고했다는 이야기.
조심하라고, 네가 나를 필요하다 느끼는 마지막 날까지 나는 살아 있었야 한다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내가 필요하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에 대한 네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불리건 그게 내가 너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다를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45년을 살았고 누군가의 아버지로는 아홉 달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아홉 달 만에 둘의 차이를 깨달았다. 너로 인해 그것을 알게 됐으니, 그것으로 네가 나를 위해 할 일은 끝났다.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렴.
나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지. 그래서 내 어머니는 두 사람 몫을 하느라 죽지도 못했어.
너의 할머니처럼, 나는 조심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각오할 것이다. 빗방울조차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
p25 인생의 역사, 신형철
아이는 사랑하는 나의 자식이다. 지금 현재 나는 아이에게 필요한 사람일 뿐.
그저 그런 관계일 뿐인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 아이는 13살, 나는 44살. 같은 무게의 삶을 살지도 않았고, 아이는 부모가 된 적이 없다.
글을 읽고서야 내 마음이 누그러졌다.
나의 부모에게 자식인 나는 늘 요구하였고, 당연하다고만 여기지 않았던가. 그 반대 상황은 연출된 적이 별로없다. 나의 부모는 요구하지 않았고, 늘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만 살펴주지 않았나 싶다. 나는 아이에게 그저 필요한 존재이다. 불가한 것만 알려주고 한없이 사랑을 해 주면 되니 말이다. 사랑을 주는 것과 아이의 곁에 오래 남아 아이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의 의무임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는 스스로 교복을 찾으려 했고 늦었다. 필요한 교복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아이에게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후회했다. 아침에 실랑이를 벌이던 일이 생각났다. 아이가 화를 낼 때 교복을 못 찾아서 짜증 났냐고 그 마음을 알아주면 좋았을 것을, 냉정하게 출발하려 하지 말고 아이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이에게 엄마의 속상한 마음을 알아달라고 빈정거리지 않았음 어땠을까. 너에 대한 조심을 하지 않았다. 너무 꽉 쥐려고 한 것 같다.
사춘기 아이는 여전히 내가 필요하고,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아이와 나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인식하고 각오할 것이다. 아이를 조심히 대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나에 대해 조심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각오하며 아이를 지켜줄 것이다.
아이가 나를 필요하다 느끼는 마지막 날까지 나는 살아 있었야 한다고.
아이가 오랫동안 기댈 수 있도록.
이번 글은 ‘희.로.애.락.애.오.욕‘ 중 ’로(노하다)‘에 관한 글 입니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성 마음' 은 초고클럽 멤버들과 함께쓰는 공동 매거진 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로.애.락.애.오.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