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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선 Mar 13. 2023

적당한 인간관계

이웃집 할머니

"우리 집 양반이 다음 달 말에 79세가 돼요. 올해에는 그 사람에게 그림을 선물해 주고 싶어요. 지난번 전시회에서 당신 새를 봤어요. 새를 그리던데... 혹시 검은 새도 그릴 수 있어요?


"그 검은 새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의미는 없어요. 겨울엔 안 보이지만 따뜻한 계절엔 '노래하는 새'로 유명한 새에요. 알아요?"

"우리는 새를 참 좋아해요."

"당신도 새를 좋아하죠? 여기 온통 새 그림뿐이네요.


"혹시 검은 새 Svarttrost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남편이 야외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이 새가 노래하는 걸 들으러 숲에 자주가요."

"그림 속 새는 외롭지 않게 두 마리 부탁해요."

"푸른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있고, 우울하지 않은 예쁘고 밝은 하늘이면 좋겠어요."

"집에 걸어두고 숲 속의 새를 보는 것도 좋겠죠?"


"혹시 원하는 새 작품 사진이 풍경 사진이 있으신가요?"


"내가 원하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만의 그림채로 그려주세요."


"네.. 한번 그려 볼게요."


옆집 할머니 A와 이야기 나누는 내내 두근거렸다. 영어를 잘 못하시는 할머니와 노르웨이어를 못하는 나와의 만남이라니. 또한 작업실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외에 내 그림을 보러 온 손님이 온 적이 없었다. 내 그림이 좋아 왔다는 분이 처음이라 설렜다. 깨끗한 레몬 무늬의 테이블보를 작업실 테이블 위에 깔고, 추울까 싶어 온돌 외에도 오일히터를 켜 두었다. 취향을 몰라서 방금 내리 커피와 뜨거운 물을 각각의 보온통에 담아두고 과일과 초콜릿을 간식거리로 꺼내 두었다. 홍차와 현미녹차 티백도 찻잔 옆에 두었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의 생일선물로 검은 새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신 할머니는 처음이다. 행운을 상징하는 새들이 많은데, 그중 검은 새라고 하니 조금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의미는 접고, 남편이 좋아한다는 노래하는 새를 집안에 걸어 보여주고 싶다는 그녀의 따뜻한 눈빛과 마음이 깊이 와닿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잘 그릴 수 있을까 하는 무거운 부담감이 있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부탁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새를 그리는 동네 화가로 대접해 준 그녀와는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svarttrost: 오렌지빛 부리를 가진 검은 새로써 노르웨이에서 노래하는 검은 새로 잘 알려진 새.




150센티가 될까 말까 한 아담한 체구의 A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곳은 헬스장이다. 작은 체구를 가진 그녀는 내가 5kg를 겨우 들 때 15-20kg 정도는 번쩍번쩍 들 정도로 단단한 몸을 가졌다. 클래스에 오는 사람들이 엄지를 들어 보일 정도로 강한 할머니이다. 또한 운동 클래스 시작 전 막간의 수다시간에도 다른 분들과 다르게 늘 조용하다. 무려 5개월 동안 눈으로만 '안녕하세요' 하던 차에 고령의 할머니 M이 나를 다른 할머니들에게 소개해 주었다.(아침운동을 나오는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70대이시다.) 매일 꾸준히 나오는 나에게 동네 주민이라는 믿음이 생겨 말을 건 것 같다. 사실 영어든 노르웨이어로든 간단한 인사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지만, 외지인에게 수줍은 그들과는 눈빛 교환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영어 교사였다는 M 할머니에게 이끌려 소개를 받은 다른 할머니들은 늘 내 앞줄에서 운동하시는 A와 K할머니였다. 두 분 다 7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늘 조용하신 분들이셨고, 그렇게 우리는 눈 대신 말을 트게 되었다.


한동안은 두 할머니들과 한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서 하루에 한 시간씩 노르웨이어를 독학했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노르웨이인을 만나 언어 교환을 했다.


5개월이 지나 처음 말을 튼 나는 A 할머니를 어디선가 뵌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몬테소리 유치원 퇴임식에 대한 신문기사에 나왔던 분이라는 것과 그녀가 우리 집 건너 1분 거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웃이었다. 늘 혼자서 걸어 다니는 것도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이웃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인지 전혀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신기하게도 하루 걸러 집 앞을 걷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짧은 노르웨이어 때문에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이제는 간단한 안부 인사나 이번주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정도는 영어와 온몸을 표현해서라도 주고받을 사이가 되었다. 2년 정도 헬스장에서 매일 보다 보니 우리는 점차 익숙한 이웃이 되었다.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그녀는 나의 SNS에 일부러 찾아와 ‘좋아요’를 눌러준다거나 12월에 참여했던 그룹 전시회에도 말없이 다녀갔다. 새해가 되었고, 운동을 마치고 동네를 운전하던 중에 산책 중인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했다. 차로 걸어오더니 차창 밖에서 다음 주쯤 작업실에 방문해도 되냐며 말을 걸었다. 노르웨이에서 길을 걷는데 누군가가 외지인에게 말을 걸어주는 일은 드문 일이다. 그리고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숲과 하늘만이 곁에 있는 시간이 지속됨에 따라 외로움이 극에 달하는 날들이 많았다. 처음으로 이방인으로써가 아닌 콩스베르그 주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하루였다.

 


노르웨이에 살면서 유난히 고독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뜸한 인간관계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인구가 적은 노르웨이의 시골마을에 살게 되면 더욱 그렇다지만, 3년간의 거주기간 동안 내가 느낀 것은 쉽지 않은 인간관계에 있다. 이사 온 첫 해 내가 휴직을 해서, 노르웨이어를 못해서, 코비드 19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외국인이라서, 페이스북 친구가 적어서 등의 이유로 인간관계를 할 수 없었다. 인간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는 나의 가족 외에는 나를 신경 쓰는 이가 전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아프거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도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일 년을 보내보니 고독했다.


노르웨이에서 직장이 없거나 공부를 (어학원) 하지않고, 아무런 봉사 활동조차 하지 않는다면, 가족 외에는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상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정도이다.

직장생활을 15년 동안 해 왔던 바쁜 워킹맘이 하루아침에 비대면으로도 대화할 사람이 없어지는 일, 고립 아닌 고립을 이겨내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오슬로에는 관광객 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꽤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노르웨이 작은 시골마을에는 동양인조차 드물다. 한국인이 이나 동양인이 주변에 없어서 고독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한국인이 없는 거주국가들을 많이 거쳐왔지만 큰 문제가 없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오랜 친분을 쌓아온 집단 (노르웨이어를 쓰는)끼리만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누군가를 만나기도 어렵지만 관계를 시작하기조차 매우 어렵다. 복직이 멀어지면서 일 년 동안 인간관계를 좀처럼 만들 수 없었던 나는 콩스베르그 작가 모임에 가입하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누드 크로키 모임도 따로 나가기 시작했다. 집단에 끼어들었고 긍정적인 인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대부분의 작가들은 20년 이상 활동한 동네 토박이들이었고 외국인인 나를 아주 천천히 받아주기 시작하였다(일 년이 넘었지만 말을 나눈 이 가 몇 안 된다).


2년이 지나서야 헬스장에서 만난 할머니들과 ‘하이 하이’ 하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매주 눈도장을 찍은 슈퍼마켓 아저씨에게 말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작가 모임을 나가고 작업실 미술 수업을 진행하자 신기하게도 복직할 기회가 생겼다. 이제는 이웃집 할머니와 길에서 대화를 나누고, 그림을 그려달라는 기분 좋은 일도 생겼다.


얼마 전 톰슨 씨가 크게 아픈 일이 있었다. 남편이 아프다는 것은 다른 가족이 없는 타국에서 육아와 집안일을 전담해야 하는 힘든 상황이 온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직장동료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는 메시지가 몇 통 왔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도와준 것은 없지만, 내 마음은 이미 든든했다. 이렇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맺은 인연들에게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헬스장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웃집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와 의사소통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고독을 넘어 우울해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작가 모임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전시회를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 관계가 아예 없으면 아무런 기회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깊은 관계는 선호하지 않지만 적당한 인간관계는 우리의 삶에 분명 특별함을 더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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