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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선 Jul 02. 2023

우아한 쇠퇴, 우아한 실패

실패에 우아할 것


우리는 앞으로도 꾸준한 실패를 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많은 부분에서 크고 작은 실패들을 경험하였지만, 인간관계나 직장에서 만큼은 긍정적으로 유지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노르웨이에 와서 3년 동안 제일 어려웠던 것이 있다면, 현지인들과 매끄러운 관계를 형성하며 내 삶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불평했다. 하지만 3년이란 시간을 겪은 후 노르웨이로 이주 후 적응하며 살아가는 많은 외국인들이나 이민자들과 이야기 나누어보니 그들 또한 인정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현지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퍼스널 버블(Personal Bubble)이다. 이는 편견이 아니다. 개인적인 공간 개념을 넘어 새로운 이방인이나 타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중 작은 버블은 매일 보는 사이일지라도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는 것, 큰 버블이라면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편의성 때문에 굳이 바꾸지 않는 것까지 크고 작은 보이지 않은 버블은 다양하다. 이 보이지 않는 작은 버블을 깨는 데는 이주민의 노력이 백 프로 요구된다. 나의 경우 많은 노력을 해서 약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일하는 장면에서,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장면에서,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하겠지요. 우리는 그때마다 우아한 쇠퇴, 우아한 실패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점차 늘려갈 회복탄력성에 기반해, 내가 지금 실패한 이 지점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성공할 때에는 아이처럼 굴어도 좋지만, 실패할 때만큼은 더 세련되고 우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뇌는 그렇게 작동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어, 당신에게 그럴 만한 기질적 자원은 갖춰져 있습니다.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노르웨이에 와서 새로운 경험을 하며 배운 것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큰 실패를 경험하였다. 18년의 유럽 생활 중 최고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실패는 우리 부부의 직장생활이다. 돈과 명예 모두 예전처럼 유지하지 못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자존감까지 떨어져 정신적으로 힘든 경험을 하게 되었다. 노르웨이에서 교육 경영자로써 큰 성공을 거둔 듯 해 보인 톰슨 씨는 알고 보니 직장 내 예전부터 해결되지 않았던 작은 버블 문제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그 일들이 모여 한방에 터져 버리고 말았다. 톰슨 씨는 30년 동안 교육자이자 경영자로써 처음 곤경에 빠진 것 같았다. 아내로서도 혹은 직장 동료로서 처음 보는 일들이라 왜 그러냐고, 강해지라며 몰아세우기만 하였다.  일 년 휴직 후 노르웨이에서  복직할 수 없어 온 콜 (on-call) 보조교사만 전전하며, 약간의 용돈벌이만 하고 있던 나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톰슨 씨가 무너지면 어쩌지. 그가 주저앉을까 겁이 나기도 했고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화가 나기도 하였다. 평소에 다툼이 거의 없는 우리는 서로 탓을 하다가 결국엔 부둥켜안고 우는 일이 반복되었다. 괴롭고 힘들다고 말할 지인이나 친구도 없었기에 소리 없는 고통은 증폭되어갔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는 일뿐이었다.    




기대하세요. 내일의 날씨, 이따가의 점심메뉴, 오랜만의 시내 외출, 개봉할 영화와 새로운 드라마.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에도 다시 일어나는 힘은, 지치지 않는 기대에서 나옵니다. 오늘 점심으로 먹은 달걀샌드위치가 형편없었대도, 저녁으로 먹을 소고기덮밥은 괜찮을 수 있습니다. 이번 학기의 학점이 개판이었대도, 내일 보기로 한 영화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취미는 '기대하는 것'. 백 번을 실망한대도.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노르웨이의 긴 겨울도 잠깐이나마 봄이 오고 여름을 맞이한다. 언제 가는 겨울이 끝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겨울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면 봄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자. 1월부터 시작된 우리의 고통이 계속되길 바라지 않았다. 따뜻한 스페인으로 휴가를 떠났다. 관계에 지친 그와 나는 따뜻한 태양아래 넓은 바다를 보며 바닥까지 떨어져 버린 우리의 자존감을 끌어올리기로 하였다. 실패에 대해 더 이상 화내지 않기로 했다. 스페인의 거리는 따뜻했고, 먹거리와 볼거리로 행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매일 아침 그가 좋아하는 하몬 햄과 맛있는 커피를 사서 바닷가가 보이는 씨뷰 호텔 발코니에서 우아하게 시간을 보냈다.


“내일은 맛있는 타파스를 먹으러 가자. 대낮에 맥주도 마시고, 낮잠을 자자. 그리고 저녁엔 파에야를 먹고 산책을 하는 거야. 내일 노르웨이는 영하 13도인데 여긴 영상 25도래! ”일주일 동안 행복한 상상과 맛있는 점심을 먹을 기대를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존성을 비난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그저 유연히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나의 의존성과 취약성, 나의 감정적 약점과 개인적 결함들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건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일리가요. 이미 배웠잖아요. 대부분의 사람은 원래 의존적이며 사회적인 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차차 나의 이 조각들을 불편감 없이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미 독립성이 높다면, 이는 많은 경우 운에 기반했습니다(풍부한 문화적 환경, 높은 사회경제적 상태와 같이 독립성을 학습할 기회가 더 많았지요).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행복했던 여행을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오자 또다시 견뎌야 하는 힘든 시간이 다가왔다.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또한 교장으로써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무거운 짐들이 그대로 보였다. 직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적인 사람들의 시선과 환경덕에 극도의 스트레스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병원에 가게 된 그에게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집에 머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떻게 지내든 내버려 두었다. 나의 한숨소리와 울분 대신 문자를 보냈다.

‘우리 이 현실을 받아들이자. 다 내려놓자. 걱정하지 마, 괜찮아질 거야, 난 당신 편이야’.


 “ 이제 우리 정리하자. 새로 시작할 준비.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그림도 그리고 일도 할 거야. 내 걱정하지 마. 당신이 하고 싶다는 커피 트럭도 해 봐. 도와줄게.”

그에게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강해지라고 하지않기로 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보호자, 당신의 책임자, 1인 가족의 가장. 당신은 이제 당신의 인생을 살아요. 당신의 가치를 주입식으로 폄하하는 부정적인 사람들, 환경들과 우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당신이 품위를 잃을 필요가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톰슨 씨와 내가 많은 생각을 정리한 후 5월이 되었다. 5개월 만이다. 그가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고 드디어 18년의 유럽생활을 접고 떠날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꾸준히 실패를 경험하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희망하는 노르웨이의 삶에서 거리낌 없이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실패에 우아하자고 마음먹으니 한결 편해졌다. 관계하였던 사람들에게서 느껴진 속상함이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은 과거에 두고 우아하게 품위를 유지하며 말이다. 새로운 도전은 아니다. 눈에 띄게 알이 크고 달콤한 사과를 가득 맺지 못하더라도 마음 편한 일을 하며 살기로 하였다. 나에게는 새로운 땅인, 톰슨 씨 고국 뉴질랜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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