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엘리 Jul 01. 2023

서비스란 무엇인가

주는 사람의 서비스 vs 받는 사람의 서비스

지금은 교사로 살고 있지는 않지만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학을 다닌 시절부터 고등학교 교사로  산 세월이 길어, 나는 여전히 교사의 정체성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것 같다. 얼마 전 읽었던 “아동학대범이 되었다”라는 한 초등교사의 브런치북을 읽고 너무나 충격을 받은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고 나서 언론에서 기사로 접하는 여러 뉴스들이 “아동학대범이 되었다”라는 책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 많이 속상하다.


학문으로의 교육학에서 교사는 성직관, 전문직관, 노동직관의 직업관으로 분류된다고 배운다. 셋 중 어느 하나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교사의 직업관을 정의 내릴 수는 없다. 그리고 교사 개개인마다 어떤 직업관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두 다를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교사로서 나는 신부나 승려만큼 성스럽고 희생과 봉사를 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도덕적이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학생을 대했고, 의사나 변호사 같은 대가나 대우를 받지 않아도 나름의 전문성을 띠고 업무를 수행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월급날이 기쁜 월급쟁이였지만, 단순히 학생이 요구하는 편의에 맞춰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직 노동자라는 생각으로 교사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대학 시절 교육학 시간에 교수님께서 해주신, “교사는 학생의 영혼을 다룬다.”라는 말에 매 순간 충실했다고 까지 맹세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 말을 교사 생활을 하는 내내 가슴에 품고 살았다.


뉴스가 우리나라 학교의 모두를 대변하고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어떤 교사들은 분명 “아동학대범이 되었다”의 해당 교사와 같은 일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안다. 교사가 아동 학대범으로 몰리는 일들이 쌓이면 교사는 성직과 전문직 사이 그 어딘가에 자신의 직업관이 놓여있다고 생각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교사는 학생과 학부모가 요구하는 대로 하라는 것은 해주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해야 하는 지식 전달 감정 노동 서비스직일까? 무형의 용역을 제공하고 부가가치를 생산한다는 서비스직의 정의로 보면 교사도 서비스직이 맞을 텐데, 교사가 아동 학대범이 되지 않기 위해 아동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아동이 원하지 않는 받아쓰기와 같은 교육 활동을 하지 않고, A학생의 정서적 학대를 막는다는 이유로 B 학생의 칭찬을 교실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 되어야 할까?


교사의 도덕성과 직업윤리를 운운하며, 교사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당연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무조건적인 친절과 배려, 양보, 인내를 해야 한다고 믿는 경우를 많이 접한다. 자신의 아이가 그 무엇보다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들먹이며 정작 비교육을 넘어 비상식적인 일까지 자행하며, 내 아이 아닌 다른 아이의 교육은 전혀 고려치 않고 교사의 교육 활동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학부모는 교사를 과연 무엇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들이 내는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게 아니냐고 큰소리치며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마는 서비스를 수행하면 그뿐인 사람으로 교사를 생각하는 것일까. 설령 교사가 서비스업 종사자일지라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처럼 여기며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것인가.




지금은 숙박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분명히 방이라는 유형의 공간을 팔고 돈을 받는 판매업이기는 하나 자판기처럼 손님이 원하는 방을 내어주고 돈을  받는다고 끝나는 일은 아니다. 친절한 태도와 따뜻한 미소로 손님을 대하고 가급적이면 손님이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하고, 기분 좋게 모텔에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서비스업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 손님으로부터 그 손님의 숙박 예약일의 저녁 시간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한 이유는 우리 모텔에서 저녁 6시 오피스 마감을 하며 해당 손님의 숙박료를 과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과금하기 전에 그 손님이 남겨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지 않아서 도착 시간을 묻고 과금에 대한 안내를 하는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손님, 알버트 넘버 식스 모텔입니다. 오늘 도착은 몇 시로 예상을 하시나요? 도착 예상 시간을 알려주시면, 그에 맞춰 방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더불어, 오늘 일자의 오피스 업무는 마감이 되어 손님의 숙박료를 과금하겠습니다. 곧 뵙죠. “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늦은 시간에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온 그 손님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며칠 전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경황이 없어 연락도 못하고 못 갔어요. 어차피 방은 이용하지 않으니 오늘 과금한 돈은 환불해 주세요. “


손님은  자신에게 닥친 급한 일 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 숙박료를 과금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인지 목소리와 말에 화가 섞여 있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 있다고, 우리는 그 손님의 화를 그대로 받을 이유가 있을까? 모텔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무조건 환불을 해줘야 할까? 그 날짜에 그 손님이 예약을 해놓아서 우리는 이 날짜에 방을 판매할 기회를 이미 날려버리고 더 이상 그 방을 팔 수 없는데 환불을 해달라는 요구에, ‘아, 예 손님 사정이 딱하시네요. 환불해 드려야죠.‘라고 웃으며 응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회차 지난 복권을 들고 와서 아직 긁지 않았으니 환불해 달라는 손님에게 환불을 해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 손님. 사정은 이해가 되나 이미 안내드린 저희 모텔 환불 정책에 따라 환불은 어렵습니다.”라고 화가 나 있는 손님의 ‘따따따따, 어쩌고저쩌고”의 욕설이 섞인 큰소리 쏘아 붙이기가 끝나기를 기다려 답했다.


손님의 끈질기고 신경질적인 환불 요구에도, 우리는 침착하게 계속 환불을 거부했다. 결국, 손님은


“내가 사정이 이렇다고,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을 다 했는데도 환불을 안 해준다고? 두고 봐. 내가 당신네 모텔 리뷰를 어떻게 남기나.” 하고 뚝 끊어버렸다.


정말로 그 손님은 리뷰를 남길 수 있는 모든 예약 사이트, 구글 검색, 페이스북까지 다 뒤져서 우리 모텔에 최악의 리뷰를 남겼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폭언과 함께 부당한 요구를 한 것은 본인이면서, 정작 우리를 파렴치한으로 몰면서 말이다.


이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나의 상식선에서 벗어나는 손님은 일일이 열거를 하지 않아도 수시로 튀어나온다. 더 많은 요구를 하고, 가능한 모든 요구를 들어줘도 몰상식한 손님은 여전히 존재한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한 어느 정도는 감내하고 얼른 잊고 넘어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서비스”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서비스업 종사자가 생각하는 서비스는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 입장에서의 서비스와 그 정의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했던 한 설문 조사 결과가 생각난다. 오래 전의 조사이기는 하지만, ”식당에서 종업원(웨이터/웨이트리스)에게 팁을 가장 많이 주는 사람은 누구일까 “가 질문이었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서비스를 많이 받은 사람이 답이 아니다. 답은 직업이 “웨이터이거나 웨이트리스”인 사람이었다. 역시, 남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상대의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일까? 부디, 서비스업 종사자이든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든 사람 대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쓰리, 투, 원“ 뉴질랜드 약국 업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