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틀넥 입은 남자

전시회

by 파란선

하이, 아이엠 리, 나이스 투 밋츄(Hi I am Lee, nice to meet you).

헬로 에브리원 마이 네임 이즈 써니, 잇츠 그레잇 투 밋츄(Hello everyone, my name is sunny, it's great to meet you).

굿모닝,....


첫날인 만큼 한참 동안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종로에 있는 유명한 영어회화에 등록하고 이곳으로 오기 위해 새벽부터 40여분 지하철을 타고 나왔더랬다. 다니는 학교가 종로에서는 아주 멀지도 않고 내가 듣는 영어 수업은 오전 7:30분으로 학교에 타격이 없는 날로 골랐다.

3학년에 재학 중인 나는 최근에 한 달간 다녀온 유럽 여행 덕에 영어에 확 꽂혔다. 여행하는 내내 '나도 영어를 잘하면 좋겠다 그리고 외국에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뿐이었다. 취직 걱정은커녕 이런 생각들로 가득하던 여름 끝자락에 무작정 영어 테스트를 보고 회화반에 등록했다. 영어 강사 선생님도 멋있고, 같이 수업을 듣는 8명 중 대부분 직장인들인데 모두들 열심이다.


나와 그 사람만 대학생이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고, 그가 공대에 다니는 복학생 3학년이라는 것을 알았다. 언제가 보았던 어떤 배우처럼 하얀 얼굴에 눈웃음 그리고 보조개까지 들어가는 인상이 고운 남자였다. 귀 밑으로 살짝 기른 머리, 하늘색 남방에 베이직 면바지 그리고 로퍼. 보통 후줄근한 공대생과는 다른 패션. 눈길은 갔지만 잘생긴 얼굴이 어쩐지 바람둥이에 여자가 많을 것 같은 사람이다.

수업 후 여성 직장인들도 그에게 관심이 가졌는지 여러 가지 물어보는 눈치이다.

오늘은 전시회가 있어 정장을 입고 왔어서 나도 얼핏 보면 직장인 느낌이 들 수 있는데, 같은 무리가 되고 싶지 않아 회화 수업이 끝나고 바로 후다닥 나와서, 회화학원 밑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셨다.


새벽부터 정신없이 나오느라 아침도 못 챙겨 먹고 나온 데다가 전시회를 가야 하는 일정이 있어 옷까지 신경 쓴 피곤한 날이다. 창밖에는 직장에 가는 사람들과 장사하는 사람들 등 정신없이 바쁜 아침시간이다. '이렇게 여유 있어도 되나.' 영어로 한 시간 내내 떠들었더니 무언가 많이 한 느낌. '졸업 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년 이때쯤 난 직장을 다니려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끄적거린다.


그런데 누군가 조용히 다가온다.


"어, 안녕하세요? 써니 님?"

"아 네.. 안녕하세요?... 리.. 님?"

"아까 자기소개할 때 들어보니 대학교 3학년이시라고요? 저도 3학년이에요.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

"아 전 17학번이요."

"그럼 제가 나이가 더 많네요. 전 15학번이에요."

"아 네... 오빠네요. 아까 보니 영어 잘하시던데요.."

"아.. 네.... 우리 같은 레벨 반인데.. 뭘요. 수업 끝나고 금방 가셔서 궁금했어요."


보조개가 들어가는 하얀 얼굴에 예쁜 눈웃음과 부드러운 그의 말은 마치 솜사탕이 입속에서 살살 녹는 듯한 느낌이다. 유럽여행에서 바짝 탄 내 얼굴과는 다르게 '리 님'은 휴가도 안 간 건지 아주 눈처럼 하얗다. 말할 때마다 들어가는 보조개는 플러스이다.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일 년이 지났다. 미팅에서 만났던 남자 친구들이라 그런 건지 사귀어도 3개월을 넘지를 않는다. 여대를 다니는 관계로 남자를 만나려면 보통 연합동아리를 가거나, 소개팅을 해야 하는데.. 최근에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마다 죄다 폭탄이었다. 마음을 비우려고 하는데 이렇게 훈남을 만나다니. 이 남자라면 여러모로 통할 것 같은데.


알딸딸한 첫 주가 지나고 그를 매주 만났다. 자주 내 파트너가 되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날은 하얀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재킷을 꼭 위에 걸치고 나온다. 아니 뭐 이렇게 패션 감각이 남 다른지. 미대에 다니는 나는 선배들 졸업 행사가 잦아 자주 정장으로 학원을 나오고는 하는데 마치 우리는 데이트하는 직장인 커플처럼 아침마다 만나 영어로 대화를 하고 시간이 허락되면 아침식사를 커피숖에서 했다. 곧 오빠 동생이 되어 매주마다 만나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우리 집에서 한정거장 거리에 살고 있었고, 학교도 바로 옆 대학교다. 우리 학교는 서울에 대표적인 여대로 근처에 몇몇 남녀공학 대학교를 이웃에 두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라니...인연인가?


하지만, 영어회화학원 가는 날 외에는 만날 일이 없었던 터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종로는 인사동과 가깝고 전공과 관련해 인사동 출입이 잦았던 나는 학원 수업 후 인사동을 찾았다. 재료도 사고 전시회를 둘러본 후 덕수궁 쪽 돌담길이 궁금해져서 인사동 거리를 지나 그쪽으로 한참을 걸었다. 돌담길 옆으로 떨어진 잎사귀를 보고서야 가을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벌써 10월이라니. 그때 보이는 00 아트센터에 '백 00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번 주에 한다고 했었는데 잊고 있었던 전시회였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오전 시간이라 금방 들어갔는데 예전에 보았던 텔레비전 작품들이 각 공간마다 전시되어있었다.


설치작품이 많았고, 그중 어두운 공간에 설치한 작품들이 몇몇 있었는데, '00가든'이라는 작품명이 눈에 띈다. 감미로운 음악과 기다란 조각 천이 천장에서부터 내려오게끔 해 놓은 곳이 칸막이에 가려져 있었다. 칸막이 안이 궁금해서 들어갔는데 아는 얼굴이 얼핏 보인다. 그는 어두워서인지 나를 보지 못했다.

'어..'리' 오빠?'

마치 밤의 시크릿가든처럼 어두운 공간 안에 가득한 식물들과 그 사이에 서있는 남자.


나는 한참을 기다란 천 조각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하얀 얼굴이,

아이보리 터틀넥에 갈색 골덴 재킷을 걸친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빛나서 마치 그 오래된 티브이의 조명이 그에게만 비추는 느낌이었다.

예술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어.. 써니???? 여기서 우연히 만나네... 전시회 온 거야? 같이 올 걸 그랬네.. 전시회 이야기도 듣고 말이지.. 써니는 어떤 작가 좋아해? 나는 초현실주의 화가들 음..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설치작품 하는 작가들이 좋더라고"

내 귀에 그가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작은 공간 안에서 나에게 바짝 다가온다.

"아.. 네..?" 너무 놀라 뒷걸음쳤다. 아까 그에게 느꼈던 그 감정이 들킨 마냥 너무 후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려서 숨쉬기도 어렵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어두운 공간이기도 하지만 작아서 뒷걸음을 친다 해도 그에게서 멀지 않은 거리이다. 한두 걸음 더 뒷걸음치다가 긴 조각 천 하나를 밟았고, 그 순간 천조각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나는 순간 설치 조명 같은 것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줄 알고 눈도 감고 머리를 감쌌는데, 동시에 그도 나를 감쌌다.

고작 천조각 아니 다행히 천조각이어서 아무런 사고가 없었지만 우리는 의도치 않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내 귀에는 쿵쾅거리는 내 심장소리와 아름답고 고요하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곡만 들려왔다.

"다행이다... 안 다쳐서."

"아..오빠 죄송해요."

고개를 간신히 들고 수줍게 나는 말했다.


우리는 엉겁결에 몸이 맞닿았고, 그는 주저앉았던 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이끌어 세워 주었다.

그가 뚫어져라 나를 보고 있었고, 내가 괜찮은지 걱정해 주었다.


"저.... 다음 전시회 같이 보러 갈래요?"


그가 잡은 내 손을 그의 입으로 가져가더니 입맞춤을 했다.


"우리... 만날까..?"


마지막 말은 내가 그에게 한 건지 그가 나에게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Francis Bacon 프란시스 베이컨 (스페인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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